
백년귀환 곽부광
— 까마귀 —
1화.
Prologue : 기억할 수 없는 악몽
악룡 아세키안 나프로미아가 판엘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은 지 20년이 지났다.
이전에 중간계를 통솔하던 인간, 엘프, 드워프들은 공포에 떨었다.
종족연합을 맺어 각 종족에서 차출한 용자들을 내세웠지만 너무 큰 힘의 차이로 패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었다. 종족연합의 대표는 중앙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아오스라는 섬으로 향했다.
그건 카부칸 라스티라는 인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카부칸 라스티는 한때 제국의 편에 서서 대륙전쟁을 끝낸 영웅이었고, 지금도 현존하는 전설로 불리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대마도사이였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카부칸 라스티를 불렀다면 승산이 있었을지 몰랐다. 다만, 종족연합은 너무 강한 카부칸의 마법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나마 카부칸 라스티가 스스로 은거를 자청해 모든 종족들이 안도하던 상황이었다.
카부칸 라스티는 그렇게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종족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 * *
대륙 남쪽 끝에 위치한 죽음의 바다.
카부칸은 나프로미아와 30일에 걸친 전투를 펼치고서 마침내 그들을 봉인시킬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제 끝이다. 아세키안 나프로미아…….”
“카부칸 라스티!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야!”
나프로미아는 카부칸이 펼친 속박마법으로 포박을 당하여 수면 위에 뜬 채로 괴성을 질렀다.
너무 큰 소리 탓에 수면이 떨렸다. 그리고 종족연합은 갑판 위에서 지켜보다가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악룡 아세키안 나프로미아이여… 끝까지 멸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카부칸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공중에 떠서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내렸다.
부글부글.
붉은 바닷물이 끓듯이 기포가 올라왔다.
동시에 주위의 배들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아세키안 나프로미아의 전신이 바다 밑으로 잡아당겨지듯 가라앉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반드시 저주할 것이야! 카부칸 라스티! 네놈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나프로미아의 마지막 발악이 이어지면서 머리까지 모두 가라앉아버렸다.
“이제 봉인의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카부칸은 수면과 가까워지도록 조금 더 내려갔다. 그리고 양팔을 다시 들고서 주문을 읊었다.
“바다를 이루는 대지의 눈물, 그 위로 불어오는 숨결, 모든 것을 포용하리라. 악의 근원, 아세키안 나프로미아! 그의 전신과 영혼을 잡아두려 한다. 푸른 대지의 봉인!”
슈아아아악!
어느새 카부칸의 머리 위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카부칸은 그것을 조종하여 나프로미아가 가라앉은 수면을 향해 쏘아냈다. 그로 인해 파도가 몰아치더니 중심부가 깊어지면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당연히 밑으로 가라앉았던 나프로미아의 전신도 모습도 보였다.
“대륙의 멸망을 기도하던 너의 바람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봉인을 풀지 못하도록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열쇠를 숨겨둘 것이다.”
카부칸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서 양팔을 교차시켰다. 그러자 소용돌이에서 바닷물이 쇠사슬처럼 형상화되었다. 끝내 나프로미아의 전신을 바닷물의 쇠사슬이 꽁꽁 싸맸다.
잠시 후, 소용돌이는 점점 잦아들어 수면이 잔잔해졌다.
큰 파도로 인해 이리저리 뒤흔들리던 커다란 배들도 상황이 끝났음을 알고 카부칸을 향해 다가왔다.
카부칸은 그 모습을 보고 공중에서 내려와 그중 제일 큰 배의 갑판 위로 착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판엘의 대마도사이시여!”
갑판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카부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감사의 목소리를 외치고는 어느 누구도 머리를 쉽게 들지 않았다.
“그만하시죠. 그리고 저도 이제 곧 떠나야 합니다.”
“떠나시다니요! 카부칸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면 이 대륙은 어찌합니까!”
“폐하… 제가 이곳에서 살아간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그만 쉴 때가 된 것입니다.”
카부칸을 붙잡은 이는 대륙의 국가 중 최강의 제국임을 자랑하는 레기온의 현 황제 레기온 곤 카르마스였다.
“카부칸, 이리 떠나셔서는 안 됩니다. 그간의 공로와 명성은 어찌하시고, 거기다 저를 은혜조차 갚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황제 카르마스가 눈물까지 흘렸다. 그 때문에 카부칸은 손가락으로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제가 봉인의 열쇠를 가지고서 여기 있다면 나프로미아를 깨우기 위해 나서는 이들이 분명 생길 겁니다.”
“그때도 카부칸께서 도와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카르마스는 아버지이자 전대 황제 레기온 곤 프레인이 나프로미아에게 죽는 바람에 급하게 자리에 오른 16살의 소년이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황제가 되기 위한 문무양도는 모두 배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험이 부족했고, 악룡의 횡포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정권을 맡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이 떠나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카부칸은 모든 이들이 붙잡으려 했음에도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칠흑의 로브를 펄럭이면서 더 높은 곳으로 몸을 옮겼다.
“100년의 세월을 보낸 판엘 대륙이여… 나의 육신은 이제 모든 운명을 다하여서 자연으로 돌아가련다.”
후우우욱.
조용히 읊조린 주문에 카부칸의 로브 끝자락이 푸른빛의 깃털이 되어 휘날리기 시작했다.
“나 카부칸 라스티의 영혼은 본래 주인에게로… 봉인의 열쇠는 위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모두 돌아가련다.”
후아아아악!
카부칸의 발끝에 시작된 변화는 무릎, 허리, 가슴으로 이어져 머리끝까지 도달했다.
미친 소녀와의 만남
횡성 문성병원 VIP 전용 1인 병실.
시간은 저녁 8시였다.
한 남자가 각종 병원기기들과 연결된 선을 몸에 두른 채 누워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곽부광. 올해 23살이다.
“허억.”
부광은 언제 깨어날지 몰랐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막혔던 코가 뻥 뚫린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아아아악!”
눈앞에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가 있었고, 그 탓에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부광의 심장은 오랫동안 잔잔하게 뛰던 탓인지 갑작스런 충격에 덜컹 멈춰버리고 말았다.
띠이이이이이이…….
심장박동기기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동시에 데스크의 비상벨도 같이 울렸다. 간호사들이 복도를 달려 병실로 급히 들어왔다.
“어머! 리치미얀! 넌 여기 왜 있어?”
부광을 빤히 쳐다보던 소녀는 간호사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리치미얀을 신경 쓰지 않고서 심장제세동기를 준비했다.
“선생님! 준비됐어요!”
어느새 부광의 담당의 문석현도 비상벨 소리를 듣고서 도착해 있었다.
“카운터쇼크 들어갑니다. 3. 2. 1. Shot!”
덜컹! 띠이이이이이…….
부광의 몸은 카운터 쇼크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듯 살짝 떴다.
하지만 이번 것은 소용이 없는지 심장은 여전히 멈춘 상태였다.
“200줄로 올려요! 바로 들어갑니다!”
문석현은 다시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충전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샷을 외쳤다.
덜컹! 삐이… 삐이… 삐이…….
“선생님! 심박이 돌아왔어요!”
간호사의 외침대로 기계에서는 심장이 제대로 뛰는 소리가 들렸다.
문석현도 그것을 보고서 다른 부분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2년 동안 조용하다가 갑자기 심정지라니. 십년감수했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거면 몸이 안 좋아지는 거 아닌가요?”
“체내 영양분 수치는 양호한 편이에요. 그 밖에 검사도 이상이 없고요.”
문석현은 부광의 담당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 다행인데… 병원에서도 신경을 제일 많이 쓰는 VIP 환자가 심정지라서 저희도 많이 놀랐어요.”
간호사도 가슴을 쓸어내리자 문석현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제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리치미얀 환자는 언제 또 여길 들어온 거예요?”
“모르겠어요. 분명히 방금 전까지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리치미얀은 많이 놀랐는지 어느새 침대에서 떨어져 소파에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아무튼 정신병동의 김해원 선생님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주세요.”
김해원은 리치미얀 외에 정신병동을 총괄하는 의사였다.
“알겠습니다. 문 선생님.”
간호사는 대답을 하고서 다른 간호사들과 같이 어질러진 병실을 정리했다.
“리치미얀! 너 여기 있었니? 빨리 병실로 돌아가자!”
간호사의 호출을 받은 정신병동의 김해원이 그녀를 보고 소리쳤다.
“으으음! 싫어! 나 여기 있을 거야!”
리치미얀은 소파를 끝을 꽉 붙잡고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병실 정리를 마친 간호사들까지 동원되어 힘겹게 정신병동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다들 나가자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밤이 깊어갔다.
병원 내 소등이 이뤄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광의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정신병동으로 돌아갔던 리치미얀이 고개를 내밀었다.
리미치얀은 안으로 들어와 잠시 부광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봤다.
“응? 뭐, 뭐야…….”
부광은 갑자기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목에 가래가 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부! 일어났어?”
“허억!”
갑자기 얼굴을 내민 리치미얀 때문에 또 한 번 심장이 멈출 뻔했다.
“괜찮아? 아까 쌤이 전기로 지지던데. 괜찮아?”
“너, 넌 뭐야?”
부광은 리치미얀의 특이한 외모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물었다.
“괜찮아? 배 안고파? 쪼꼬! 먹을래?”
“너, 넌 누구냐니깐?”
“나? 리치미얀! 싸부 제자!”
리치미얀은 여전히 부광의 배를 깔고 앉아 정상이 아닌 것처럼 이상한 소리만 내뱉었다.
“난 너 몰라! 크윽… 그보다… 여, 여기는 어디야?”
불이 꺼져 어두웠다.
하지만 창문에서 비춰지는 환한 달빛에 병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벼, 병원인가? 그러고 보니깐… 실험 중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부광은 마지막 기억을 희미하게 떠올리고는 지금도 얼굴로 초콜릿을 들이미는 리치미얀을 쳐다봤다.
“먹어! 쪼꼬! 맛있어!”
갑자기 리치미얀이 부광의 입으로 초콜릿을 들이밀었다.
“읍! 읍!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누, 누구 밖에 없어요!”
부광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리치미얀의 손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밖에 있던 간호사들이 부광의 외침을 들었는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곽부광 환자가 깨어났어요! 빨리 선생님 좀 불러와요!”
간호사에게는 지금 부광에게 닥친 상황보다 깨어난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리치미얀을 떼어내주지 않고서 의사부터 찾았다.
“얘, 얘 좀 어떻게 읍! 해봐요!”
“쪼꼬! 맛있어! 먹어! 먹어!”
그 탓에 리치미얀의 초콜릿 공격은 계속됐다.
“이것 좀… 읍! 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