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천하
천부천하
천부천하
지은이 : 비검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0-06-30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2동 163-2 서경빌딩 3층
전화번호 : 032-656-4452
이 책은 도서출판 청어람이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전자책으로 발행된 것이므로 불법복제 및 유포, 공유를 금합니다.
천부천하
序
천부(天府)가 세워진 지 십 년이 지났다.
마도의 종주인 천마신교가 마도십문을 이끌고 정파를 몰락시킨 지 역시 십 년이 흘렀다는 얘기. 철저하게 몰락한 정파 후예들의 거센 저항도 이제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쏴아아악! 쏴아아악! 쏴아아악!
정파의 최후를 슬퍼하기라도 하듯 한여름 폭우가 온 천지에 거세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폭우는 마치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헉헉! 헉헉! 헉헉!”
장대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을 한 젊은 남녀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사내. 아니다. 그의 몸은 빗물이 아닌 검붉은 핏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이 사내…….
분명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혈투를 벌였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 피의 가시밭길로 점철된 혈로를 뚫고 이곳까지 온 것이리라.
그리고 한 여자.
사내의 손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꽉 쥐고 있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울고 있었다. 여인의 눈물은 쉴 새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인도 울고, 천하도 울고, 하늘도 울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부디 저희를 도와주소서. 하늘이시여…….’
여인은 수백, 수천 번이나 하늘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거센 빗줄기만 내려줄 뿐이었다.
털썩!
사내의 손을 잡고 힘겹게 뛰던 젊은 여인이 한계에 도달한 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인의 발은 퉁퉁 부어올라 온통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 사이로 붉은 핏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태라면 진즉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어야 정상이리라.
“이랑(李郞)…….”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산발이 돼 있고, 얼굴 곳곳에는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당연히 보기 흉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의 미모는 그런 것으로는 절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모[傾國之色], 그 미모에 물고기도 연못 속에 잠기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도 화들짝 놀라 땅에 떨어질[侵魚落雁] 정도의 미녀.
경국지색, 침어낙안의 미모를 지닌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가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가득했다. 그녀가 이제는 더 이상 달리지 못할 것을 알아챈 사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불렀다.
“설 소저…….”
사내의 눈에서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한의 눈물이었다.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여인은 명문세가의 규수였다. 그녀의 미모와 학문, 그리고 기예는 세상이 알아주는 바였다. 만약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여인은 천부 소부주의 아내로 황후처럼 살고 있을 터였다.
‘설 소저, 나는 당신께 지금껏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구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겠소.’
사내가 들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대장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철검이었다. 하지만 이 사내의 손에 들렸기에 이 철검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닌 검이 되었다.
사내의 이름은 이연.
천부의 천하가 된 이후,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완전히 몰락한 정파가 남긴 최후의 검객이라고.
그리고 또 이렇게 불렀다.
대협(大俠) 이연이라고.
강호를 일통하고 천하를 지배하는 천부의 부주, 신마 진림마저 크게 감탄했다. 적이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이연의 무위를 칭찬하며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연이 나와 같은 길을 걸었다면 나는 당연히 천부를 그에게 물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연이 결코 그 길을 걸었을 리 없다. 끝까지 저항하는 그의 목에 천부는 무려 은자 십만 냥이라는 천문학적인 현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곁에서 멀리 둔 적 없는 ‘의(義)’라는 문구가 적힌 철검, ‘의혈검(義血劍)’을 가져오는 자에게도 동일한 금액을 지급한다고 천하에 공포했다.
쉬시식! 쉬시식! 슈슈슉!
폭우를 뚫고 이백에 육박하는 무사들이 순식간에 날아왔다. 경신술 하나만으로도 이들 모두가 절정에 다다른 고수임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연이 그들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천마대에 오행마검대까지 모조리 온 것인가. 천부가 나 이연을 너무 높이 보아주는구나.”
천마대와 오행마검대.
능히 정파 전체와 겨룰 수 있다고 알려진 천부 제일, 제이의 전투부대였다. 그들이 총출동한 것.
하늘을 보며 크게 탄식했다.
“나는 오늘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알고 있었다. 천부와 계속해서 싸워왔기에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를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천부야말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집법세일 터였다.
거센 빗줄기가 갈라지며 천마대와 오행마검대가 예정된 대로 움직였다. 그들이 순식간에 이연 주위를 둘러쌌다.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 같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두 전투부대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곧 포위망 속에서 두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중 한 사람, 거구에 호랑이 수염을 가진 사내가 크게 웃었다.
“마침내 이날이 왔구나! 이연, 네놈의 의혈검을 부러뜨리고 목을 잘라 버릴 날이 말이야! 하하하!”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내를 보며 이연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진양이구나.”
그리고 말했다.
“비만 오면 일전에 내 검에 찔린 옆구리 상처가 죽을 듯이 쑤신다지?”
그 한마디에 웃고 있던 진양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천부 부주 진림의 둘째 아들 진양. 수백 년 동안 새외에서 군림해 온 거대 세력인 대막 광풍문을 단신으로 평정한 절대고수다. 또한 십 년 전, 정파의 태두였던 소림의 기둥뿌리를 뽑아 용맹을 과시했던 그다.
하지만 이토록 대단한 진양 역시 이미 이연의 검에 패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이 있었다. 대협 이연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만했다.
진양이 분노에 치를 떨며 옆의 사내에게 강하게 청했다.
“형님, 이연의 목은 반드시 소제가 자르게 해주십시오!”
진양이 형님이라 부른 이는 천부 부주 진림의 장자, 현재 천부의 소부주인 진가유였다.
“…….”
진가유는 말이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끝없이 쏟아지는 여름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심정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미치도록 이연을 죽이고 싶었다.
‘내 정혼녀의 마음을 훔쳐 함께 도주까지 한 천하의 간적이 아닌가?’
이연과 함께 도망치던 여인 설소천은 진가유의 정혼녀였다. 그것만 생각하면 이연을 천 번 만 번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다.
‘그러나…. 죽이기에는 진정 아까운 사내다. 이제는 이자를 벗이라 부를 수도 없겠지. 하지만 나와는 한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벗이 아니었던가?’
정과 마의 경계를 넘어 자신과 이연은 하늘 아래 제일의 벗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나누었던 진정한 사내 이연에 대한 연민의 정도 컸다.
‘벗이여, 나의 벗이여…….’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진가유의 눈이 이연의 눈과 마주쳤다.
이연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내 평생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건만, 이번 일만은 자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네.’
‘…….’
아무런 답이 없는 진가유의 눈. 그런 그를 향해 이연이 다시 한번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대체 정이란 무엇인가. 그 정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나와 자네가 이리되었단 말인가. 정이란 것에 굴복해 나는 자네에게 큰 죄를 지었네. 그 죄는 무엇으로도 씻을 길이 없네.’
이연의 눈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내 생의 마지막 순간. 내가 자네에게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네.’
이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절대 나를 용서하지 마시게, 벗이여…….’
이연이 자신의 의혈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던지 검파를 잡은 그의 손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흐를 정도였다.
그가 소리쳤다.
“소부주, 나는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이오.”
이연의 말에 진양이 비웃었다.
“네가 상황 파악은 빠르구나. 흐흐흐,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자식…….”
“그만.”
진양이 계속해서 험악한 욕설을 쏟아내려는 것을 형인 진가유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진양은 진가유의 명을 감히 어길 수 없어 입을 닫고 말았다.
“나는 죽을 것이되,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네. 그리되면 천마대와 오행마검대의 절반은 오늘 나와 함께 북망산을 넘을 것이고.”
‘무슨 개소리냐.’라는 말이 진양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진양은 차마 그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연의 저 장담은 허황된 것이 아닌 진실 쪽에 보다 가까웠기에.
그랬다. 정파 최후의 협객 이연은 그 정도로 대단했고, 그 사실만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부주가 천마대와 오행마검대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이연의 말에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진가유가 처음으로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저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내 한쪽 팔을 잘라준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니.”
고귀한 신분의 진가유다. 그런 그의 진심 어린 말에 천마대와 오행마검대의 무사들이 크게 감격해 일제히 소리쳤다.
“소부주님, 저희는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천부의 대적(大敵)을 향해 검을 뽑으라 명해주십시오!”
천마대와 오행마검대 또한 진심이었다. 그들은 진가유를 소부주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진가유를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 진짜 열혈남아들이었다.
천하제일 전투부대, 천마대의 대주인 적룡이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소부주님, 저와 천마대가 선봉을 서겠습니다. 저희 천마대 전원, 소부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최근 오행마검대를 맡은 젊은 대주 장명 또한 간절한 어조로 소리쳤다.
“소부주님, 저자는 저희 오행마검대의 전대 대주를 죽인 불구대천지수입니다.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소부주님을 위해 흘릴 각오가 돼 있습니다!”
이연을 죽이겠다는 맹세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소부주에게 제안하고자 하네. 한 가지 청만 들어준다면…. 나는 스스로 자결할 것이네.”
이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진가유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연의 시선이 움직였다.
진가유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일한 곳에서 함께 멈췄다.
그곳에는 두 사내가 동시에 사랑한 여인, 설소천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시선이 왜 그곳에 멈췄는지를 알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할 일이었다.
이연이 눈빛으로 진가유에게 물었다.
‘…해줄 수 있겠는가?’
진가유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내 이렇게 간청하겠네.’
이연이 다시 한번 간절히 청했다. 하지만 진가유는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설소천에 대해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증이 교차하고 있었기에.
‘그리만 해준다면 내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것이고, 팔다리를 자르라면 자를 것이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천부 앞에서 개처럼 짖으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설소천의 목숨만 살릴 수 있다면 진정으로 그리할 것이다.
탁!
이연이 진가유를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일생 단 한 번도 적을 향해서는 물론이고 하늘을 향해서도 무릎 꿇은 적 없는 강철 같은 사내다. 그런 사내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평생을 증오하던 대적인 천부 앞에서.
그 모습에 천마대와 오행마검대는 물론이고 진양마저 놀라고 말았다.
‘이연이, 천하의 이연이…….’
‘자존심 하나로 그 힘든 십 년을 버텨오던 자가 무릎을 꿇었다.’
천마대와 오행마검대 중 일부는 그 모습에 오히려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도 들었다.
‘그대가 이리 무너지면 그대에게 죽은 우리 형제들이 원통해 하지 않겠는가? 일어나시오, 이연!’
‘그대는 마지막까지 무너지면 안 되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치열하게 싸워온 우리마저 같이 무너지는 꼴이 되지 않겠소?’
오랜 시간 싸워 오며 어느덧 자신들의 적인 이연이라는 자에게 내심 경외감마저 들었었다. 그런 존재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다니. 이것은 이연이 무너지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 또한 함께 무너지는 것이었다.
“소부주님, 이리 부탁드립니다.”
이연은 거침없이 검을 들었다.
쉭!
의혈검이 그의 왼팔을 잘라냈다. 그 자리에서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
하지만 진가유는 답이 없었다.
“다시 간청 드립니다.”
이연의 손이 움직였다.
휙!
이연이 왼쪽 눈알을 뽑아 폭우 속에 던졌다. 이연의 얼굴에 피와 함께 눈물이 흘렀다.
이연은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가유의 미간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연이 이제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살려주십시오!”
콰르릉! 콰르릉!
폭우를 쏟아내던 검은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뇌성이 터졌다.
여름의 폭우는 미친 듯이 쏟아졌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제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폭우 속에서 진가유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
이연은 웃었다.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었다. 피와 눈물, 그리고 빗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빗물에 섞인 피눈물이 연방 이연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연이 진가유를 보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미안하네, 나의 벗이여…….’
이연은 고개를 돌려 탈진으로 혼절해 있는 설소천을 바라봤다.
‘나를 잊고 행복하게, 부디 그렇게 살아주시오, 설 소저.’
설소천을 향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거두고 저 멀리 동쪽을 바라봤다. 그랬다. 그 방향은 어둠이 지나면 곧 밝은 태양이 떠오를 동쪽이었다.
‘내 아들에게는 이 아비가 도저히 그 죄를 씻을 길이 없구나. 아들아, 이 못난 아비를 절대 용서하지 말거라.’
도주하며 항주에 맡긴 아들. 살았는지 죽었을지 모를 불쌍한 아들. 아비와 어미의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자랄 아이. 천덕꾸러기로 항주 거리를 떠돌 불쌍한 아이. 그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들아, 아들아…. 이 아비를 죽어서도 절대 용서하지 말거라.”
그리고…….
휙!
의혈검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다시 내려왔다. 검 끝은 이연의 복부를 향했다.
콸콸콸! 콸콸콸!
의혈검이 그대로 등까지 뚫고 나가며 붉은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연이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사나이 한 인생, 후회는 없다! 검을 들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를 행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정을 나누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길을 진정한 벗이 보아주니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나 이연, 이렇게 떠나려 한다!”
털썩!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세를 풍미한 정파의 마지막 대협객 이연은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렇게 반각 정도가 흘렀을까?
살아 있는 이연뿐만 아니라 죽은 이연에게까지도 여전히 두려움을 가진 진양이었다. 그가 마침내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이연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곧 이연의 호흡이 없음을 확인했다.
푸욱!
그의 몸에 꽂혀 있던 의혈검을 한 번 더 깊이 찔러 넣으며 재차 죽음을 확인했다.
“으하하하!”
폭우 속에서 미친 듯이 웃어댄 진양이 수도(手刀)로 의혈검의 검날을 반으로 잘라 버렸다.
“마침내 의혈검도, 이연도 끝장이 났다. 천부에 도전했던 마지막 정파의 불꽃이 꺼진 것이다. 하하하하!”
그는 반 토막이 난 의혈검을 들어 이연의 목을 베려 했다.
“그만!”
뒤편에 서 있던 진가유가 그를 제지했다.
“비록 적이었고 큰 실수를 하긴 했으나 존중받아 마땅한 자다.”
진가유는 오행마검대주를 가리켰다.
“장명, 이연의 시신을 수습해 후히 장사 지내주도록 해라.”
오행마검대주 장명이 바로 답했다.
“존명!”
이연의 목을 자르고,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던 진양은 불만이었다. 하지만 신교의 적통이자, 천부의 소부주인 형의 명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설소천을 향해 걸어갔다.
“형님, 간적 이연과 야반도주한 저 간부 년은…….”
진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진가유가 그답지 않게 크게 화를 냈다.
“누가 간부란 말이더냐? 너는 감히 형의 아내 될 사람을 간부라 칭한단 말이더냐?”
평소에는 온화하기 그지없던 형이 이처럼 화를 내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진양이었다.
“혀, 형님! 저 간부 년은 형님을 배반하고 이연과 야반도주를…….”
다시 한번 진가유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 형수를 간부라 부르는 천하의 막돼먹은 놈이 어디 있더냐?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연이은 노호성에 진양은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형님은 저 간부 년을 용서하려는 것이구나. 형님은 사내도 아니란 말인가? 어찌 다른 놈과 붙어먹은 계집과 살려 한단 말인가.’
진양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으나 신교의 적통 장자인 형에게 감히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곧 이연의 시신을 수습하고 설소천을 천부로 데려가는 일을 마쳤다.
일을 끝낸 진가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연이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었던 동쪽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연…. 그대는 무슨 생각으로 이쪽을 그리 간절히 바라봤던 것인가?’
지독하게 쏟아지며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도 어느새 지나 새벽이 찾아왔다.
곧 진가유의 눈에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떠오르는 태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지 느낌뿐이었을까?
지금 떠오르는 태양은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밝고,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로 찬란한 빛이었다.
“새로운 날이 오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구나. 새로운 태양이.”
진가유는 몇 번이나 새로운 태양이란 말을 반복해서 읊조렸다.
“이제는 새로운 태양의 시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