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제1장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내린 선택이 가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 인간은 후회한다.
그때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분명 다른 길이 있었는데 왜 나는 이 길을 선택했을까.
설령 다른 길로 갔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스스로의 만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인으로 살면서 다짐했던 일이 있다.
그 일을 끝마치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했으며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인생, 살았던 인생, 앞으로 살아갈 인생.
그 모든 것에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
검을 고쳐 쥐었다.
반쪽으로 갈라진 의천검倚天劍은 이름에 담긴 위용에 비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예기는 잃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피로 물든 백색 장포를 걸치고 있던 노인이, 벽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은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고 입가에는 검은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두魔頭 새끼, 다시 생각해도 죽이길 잘했군.”
여기서 말하는 마두 새끼는 나를 뜻하는 거고 죽이길 잘했다는 말은 내 죽음을, 노인은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시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내가 갈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단전이 개박살 난 데다가 팔다리는 힘줄이 전부 끊겼으니까.
그가 그렇게 자랑하던 탈혼경脫魂境의 단은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유언은 그게 전부인가?”
내 말에 노인이 말했다.
“곧 선계가 열리고 신선들께서 네놈을 벌하러 이곳에 강림하실 것이다. 엿 같은 마두 새끼, 꼴좋구나. 결국 네놈의 끝도 처참할…….”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의천검을 휘둘렀다.
서걱-!
노인의 목이 하늘로 솟구친다.
세상의 이면에 숨어 무림을 어지럽히던 버러지들의 수장, 일검진천 독고진은 그렇게 죽었다.
독고진의 시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언을 남기랬지 누가 개소리를 남기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일검진천一劍震天 독고진独孤進.
설황雪皇 상문천向問天.
환희옥불歡喜玉佛 은소소殷素素.
구천마제九天魔帝 양소楊逍.
잔혼금강殘魂金剛 주영珠纓.
신선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신선계로 가지 못한 이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지금 죽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외에 무림에서 모습을 감췄던 전대 지존들과 현세대의 지존 자리를 다투던 이들도 시체가 되어 있었다.
이 말은 꼭 해야 했다.
하나같이, 죄다 등신 같은 놈들.
그중 몸이 반으로 절단 난 시체 하나가 있었다. 그는 매우 고통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죽기 전에 단전을 부수고 사지를 조각내고 혈맥이란 혈맥을 전부 불태워 버렸으니까.
일종의 고문이라고 봐도 좋았다. 애초에 저놈을 ‘옆’에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무공에 대해 알려 준 게 잘못이었다.
적극적으로 강해지려는 모습이 예전의 내 모습과 같아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배신이었다.
천참만륙으로 찢어 죽여도 모자랄 새끼가 저놈이다.
수라마존 정소방.
놈을 잠시 내려다보다 한숨을 터트렸다. 이미 뒈진 놈이다. 천참만륙으로 쪼갤 힘도 없다. 만사가 귀찮았다.
천천히 몸 내부를 점검했다.
팔 하나는 날아갔고 갈비뼈는 대충 다섯 개 정도 부서졌으며 그중 두 개의 뼈가 폐를 찌르고 있었다.
다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 조금 난 거 말고는 별 이상 없어 보였지만 지금 걷기도 힘들다. 신경과 힘줄이 완전히 끊겼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지금 이 정도나마 걸을 수 있는 건 인人을 초월한 육체 덕분이다.
가장 중요한 단전을 점검했다.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을 뿐.
다음으로 선기仙氣를 자극해 보았다.
꿈틀, 세상천지의 기운이 요동친다. 다만 그 반발 작용으로 온몸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노인의 말이 맞다. 이 자리에서 나는 죽는다.
다만 딱 한 번.
딱 한 번의 공격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사선을 넘나들며 살았는데 막상 죽음이라는 게 닥쳐온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야릇하기도 하다.
그러다 푹,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죽일 놈들이 그저 많았을 뿐인데.
나는 항상 나를 위해 살았다.
나를 위해 재앙을 막으려 했을 뿐이다.
세상을 구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것도 없었다.
무림 지존. 인계의 지존.
대마두, 무림공적.
나를 부르는 수식어는 많다.
이들은 괴물이 된 나를 믿지 않았다.
쩌저적-!
하늘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쿵쿵쿵-!
북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경계가 찢어진다.
그곳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기운들이 땅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터지며 땅이 전부 뒤집어진다. 장관이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멀쩡한 하늘에 비가 내리고, 번개가 내리치며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자연 자체가 순식간에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그 중심에 다섯 개의 인영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들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 거리였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다섯은 하나같이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머릿속에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르긴 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건 아마 ‘제사祭祀’에 관련된 것 때문일 거다.
수백 년 전부터 무림에는 신선들을 기리는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매년마다 제단에서는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사가 대략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내가 그 제단의 제사장들을 전부 죽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거 때문에 쟤네들이 저렇게 화가 잔뜩 난 게 아닐까.
여하튼, 단 한 점의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빛에 가려진 다섯 개의 인영이 나를 바라본다. 반쪽만 남은 의천검을 고쳐 쥐었다.
오랫동안 이 검과 함께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하늘에 있던 다섯의 신선 중 하나가 내 쪽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에 우웅, 굉음이 울린다.
천지가 진동한다. 미친 듯이 하늘에서 나풀거리던 눈과 그 눈을 타고 세상에 흐르는 모든 번개들을 뚫고.
한 줄기 섬광이 소리 없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내가 살면서 느껴 본 그 어떠한 살기보다 가장 농밀했으며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소가 진해진다.
나도 있는 힘껏, 선기를 끌어 올렸다.
쿠구궁.
뒤집히고 하늘로 솟구치던 땅들이 우뚝, 멈춘다.
바뀌었던 자연도 그대로 멈췄다. 허공에서 내리치던 번개가 멈추고, 눈보라가 멈추고, 비바람이 멈춘다.
내게 뻗어 왔던 섬광은 내 이마에 닿기 전, 정확히 한 치 거리를 두고 멈춰 있었다.
모든 것이 장관이었다.
그제야 다섯 신선의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놀란 거다.
사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만약 내 몸이 멀쩡했더라면 지금 저 다섯 중 최소 셋은 무조건 이 자리에서 목이 따였을 테니까.
의천검倚天劍을 옆으로 늘어뜨렸다.
나는 새외의 지존이었으며 사파의 지존이었다.
또한 중원의 지존이었으며 무림의 지존이다.
내 위는 없다.
내가 하늘이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마지막 남은 진기도 끌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생명력이 박살 났던 몸의 감각을 깨워 준다. 선기가 몸을 회복시켜 준다. 단전에 자리 잡은 작은 구슬이 심하게 요동친다.
시야가 또렷해진다.
파지직.
몸에서 검은색 번개가 치솟는다.
[흑뢰천상黑雷天上]
[뇌신강림雷神降臨]
내 몸은 자연 그 자체가 되었다. 단전이 꿈틀거리고 자연기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흑뢰가 내 몸을 감싸고, 선기의 영향으로 뿜어져 나온 검은색 연기도 내 몸을 감쌌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몇 놈이나 데려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두세 놈 정도는 잡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신선이래 봤자 칼 쑤시면 피 흘리고 목 날리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니까.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긴 한데 상관없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을까.
자리를 박찼다. 번개가 세상을 뚫는다.
의천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공간이, 요동친다.
무림에는 여러 개의 무공이 있다.
그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공격적인 무공은 무엇일까.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무림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무신탄천금신결武神吞天金身訣]
이게 현 무림에서 최고의 무공이다.
혀로 입술을 핥았다.
순식간에 내 몸은 다섯 신선의 근처로 와 있었다.
그들을 향해 의천검을 휘둘렀다.
방향은 좌 하단에서 우 상단.
쩌저저적, 검의 궤적에 따라 공간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쿨럭, 피가 터져 나오며 팔에 힘이 살짝 빠졌지만 무시했다. 몸이 계속해서 경고를 내린다. 이제 그만하라고.
그만 휘두르라고.
이것도 무시했다.
눈이 번뜩인다. 마저 힘을 실어 휘둘렀다.
[무신탄천금신결武神吞天金身訣]
[일천세계一千世界]
서걱-!!
신선 하나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소리는 뒤늦게 울렸다.
하늘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고 땅을 비롯해 내 검의 궤적에 있던 산과 땅이 전부 갈라져 있었다.
감탄할 시간은 사치다.
다섯 놈 전부를 노렸는데 고작 하나다.
놀란 표정으로 물러섰던 네 놈이 기운을 끌어 올린다.
하늘이, 그리고 세상이 내려앉는다.
소리는 없었다.
소리조차 씹어 삼켰기에.
하늘에 원형의 구체가 생겨나는 것까지 느꼈다.
눈이 멀 정도로 눈부셨다.
주눅 들지 않았다. 포기도 하지 않았다.
한 번만 공격이 가능하다 했었는데 아니다. 모든 것을 걸고.
생명을 불태운다면.
어떻게든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아직, 나는 검을 들고 있다.
[무신탄천금신결武神吞天金身訣]
우두두둑.
팔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지만 역시, 무시했다.
허공에서 춤을 추듯, 의천검이 선을 그린다. 하나의 세상이, 두 개의 세상이, 백 개의, 천 개의, 만 개의 세상이 허공에 금을 그린다. 빛 무리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세상에 남을 작품에 마지막 붓질을 하듯이.
의천검이 정면을 향해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오의奧義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쩌어어엉-!!
하늘이 깨졌다.
다시 보인다. 당황한 네 명의 노인.
두 명은 여자였고 두 명은 남자였다. 방금 막 뒈진 놈도 남자다.
놈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쳐 보일까.
아마 괴물로 비쳐 보이지 않을까.
웃었다.
놈들 눈에 웃는 내 얼굴이 비친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무신탄천금신결武神吞天金身訣]
[중천세계中天世界]
세상천지가 세상의 중간에 선을 긋는다.
그 선은 그대로 내려앉았다.
무신회귀록
지은이 : 넉울히
제작일 : 2022.03.14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진선미
표지 : 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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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6811-9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