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1화
“점심 배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두 빠르게 준비해 주세요!”
귀청을 울리는 영양사의 날카로운 목소리.
“네! 영양사님!”
주방에 있는 20명 정도의 조리사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리사라고 해 봐야 태반이 40대 아주머니들이지만, 비정규직으로 요리 관련 경력을 쌓기 위해 주방에 들어온 20대 청년도 있다.
“정동 총각, 콩나물 손질 다 되어가나?”
김씨 아주머니의 물음에 주방 한구석에서 콩나물 꽁다리를 손질하고 있던 한 청년이 대답했다.
“네! 거의 다 되어갑니다!”
나름대로 준수하고 순수한 외모를 가진 이 청년의 이름은 정정동.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24살 새내기다.
아무런 꿈 없이 괜찮은 서울권 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뒤늦게 요리에 흥미가 생겨 요리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공무원이 될 줄 알았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에도 불구하고 정동의 부모님은 늦었지만 네 꿈을 찾아 다행이라며 응원해 주셨다.
요리 학원에 다녀 기초적인 것들을 배워 자격증을 딴 뒤, 첫 경험을 쌓을 곳을 찾다가 들어온 곳이 바로 이 하나 대학 병원의 주방.
병원의 주방이라고 해서 다른 식당과 엄청나게 다른 것은 없었기에 비정규직으로 2달째 근무 중이다.
매일 바뀌는 식단에 따라서 여러 가지 요리를 해야 했기에 많은 요리 경험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뭐, 하는 일이라고는 대부분이 지금 같은 재료 손질이지만 말이다.
“김씨 아주머니, 여기 손질한 콩나물이요!”
썩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콩나물들을 솎아내고 식감이 질긴 꼬리 부분은 비틀어 잘라낸다.
노란색 대가리를 따 주는 것이 먹기에는 좋지만, 대가리에 영양소가 많았기에 그냥 두었다.
병원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 잡힌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음, 상태 좋고! 역시 정동 총각이 뭐 하나 시키면 성실하게 잘한다니까?”
하나 병원 주방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김씨 아주머니의 칭찬에 정동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이, 뭘요. 제가 또 할 게 있나요?”
“으음…… 손질할 양파가 조금 있기야 하지만, 오늘 황씨 아주머니가 안 나와서 일손이 조금 부족하거든. 어디, 정동 총각이 냄비 한번 잡아볼래?”
“헉! 그래도 되나요!”
주방에 들어와서 2달 간, 재료 손질이나 설거지 같은 잡일만 하던 정동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조리 기구를 잡아 보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비록 그 이유가 황씨 아주머니의 결석이라지만, 마음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기 큰 냄비 두 개 보이지? 환자식으로 들어갈 고등어조림 냄비인데, 별거 없이 저어 주면서 타지 않게만 해 주면 돼. 국물이 너무 졸아든다 싶으면 물 넣어 주고. 알았지?”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정동은 주방의 한 모서리를 가득 메운 커다란 화구(火口)앞에 섰다.
업소용이라 그런지 가정용 가스레인지와는 화력의 급이 달랐으며, 한 번에 몇백 인분을 만들어야 하기에 냄비의 높이가 정동의 가슴팍에 닿았다.
팔을 뻗어야 겨우 닿아지는 큰 냄비 두 개에는 반 정도 완성된 고등어조림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우선 타지 않게…… 끄응차!”
마찬가지로 엄청난 크기의 철제 국자를 낑낑대며 든 뒤 냄비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휘저었다.
힘을 많이 주면 고등어의 살이나 무가 부서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대형 냄비 두 개를 감당하는 것은 상당히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충 젓기만 해도 되는 작업이지만, 정동은 하나하나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
‘어떤 것이든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게다가 이 음식은 몸이 아픈 환자들의 입으로 들어갈 것들이고. 대충 할 수 없지.’
특히 자신의 손을 거쳐 완성된 음식이 환자들의 피와 살이 된다고 생각하자 절대로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어릴 적에 다닌 교회의 목사님은 항상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관해 설교하셨다.
중학생 때 친구의 권유로 다닌 절에서 만난 스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정동의 부모님 또한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타인을 곧 나처럼 여기라고 매일 이야기하셨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성실한 청년, 정정동을 만들었다.
“흐음…… 국물이 너무 적으려나?”
작은 수저를 꺼내 국물을 조금 퍼 맛을 보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입맛에서 싱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짠맛과, 오이고추 정도의 작은 매운맛이 느껴졌다.
“으음, 너무 짜고 매워. 물을 더 넣어야겠어.”
그러나 이곳은 병원, 그것도 특히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이 모이는 대학 병원의 주방.
조금이라도 몸에 자극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음식에 최소한의 염분만 들어가야 했기에 지금도 너무 짰다.
철제 바가지를 들어 수돗물을 몇 번 부어넣은 뒤, 다시 맛을 본 정동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좋아, 이 정도면 딱 적당해.”
아주 조금의 짠맛만이 잠깐 혀에 느껴지다 이내 사라진다. 그 대신, 안에 들어간 식재료 본연의 맛이 더 크게 느껴진다.
병원식으로 들어가기에는 딱 적당한 염도. 이제 남은 것은 한번 푹 끓여 주는 것뿐이다.
“제육볶음 다 떨어졌어요! 추가 부탁드려요!”
“김치! 김치 좀 더 꺼내 주세요!”
환자식으로 들어갈 고등어조림을 담당하는 정동과는 다르게, 병원의 임직원들이 먹을 일반식을 만드는 곳은 완전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대부분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들이 잘 없는 어정쩡한 시간대에 밥을 먹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점심 메인 메뉴는 맵싸한 홍고추와 후추를 듬뿍 넣은 칼칼한 제육볶음.
같이 나가는 배추김치 또한 백김치에 가까운 환자식과는 다르게 시뻘건 양념이 뚝뚝 떨어지는 일반적인 배추김치였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환자가 아닌 직원들은 일반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환자식과 일반식. 두 가지의 음식을 하루에 세 번씩 만들어야 하는 대학 병원의 주방은 한 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물론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배워갈 것도 많다는 뜻이기에, 정동은 요리에 대한 열망 하나로 힘든 일을 견뎌내었다.
“뭐, 저분들에 비하면 난 명함도 못 내밀지만 말이야.”
정동이 맡은 냄비가 있는 곳의 정면으로는 임직원 식당의 전경이 보였다.
오후 3시. 점심을 먹기에는 상당히 어정쩡한 시간이지만, 임직원 식당은 막 회진을 끝마치고 온 흰 가운의 의사들과 여러 간호사들로 인해 엄청나게 붐볐다.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와 밥과 제육볶음을 식판에 퍼 담은 뒤 한데 비벼 마구 입으로 가져가는 의사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모두가 동경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정동의 바로 앞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던 의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킨 뒤, 바로 전화를 받은 그는 말했다.
“무슨 일이야! 뭐, 뭐라고? 환자가 갑자기 어레스트(arrest)에 빠져? 빨리 CPR부터 해!”
즉시 식기를 내려놓고 입에 묻은 양념도 닦지 않은 채로 비상계단으로 뛰어가는 의사.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 의사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물론,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정동도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레스트라니…… 부디 아무런 일도 없이 무사히 소생하시기를.”
어레스트는 심정지를 뜻하는 의학 용어. 의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정동이었지만, 2달 정도 병원 주방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조금 알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심정지라면 언제 환자가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매우 심각한 상황.
일터가 일터이다 보니, 이런 마음 아픈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신이시여, 부디 모든 환자들이 다시금 일어날 수 있게…….”
고등어조림이 문제없이 잘 끓고 있었기에, 정동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교회와 절을 전부 다녀 보았지만 신앙심이 생기지는 않아 무교였다.
그러나 정동은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에서 생긴 하나의 습관이었다.
“……평안과 힘을 주세요.”
1분 정도의 짧은 기도를 마친 정동이 다시 국자를 들려던 찰나,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타인을 생각하는 너의 진실하고 순결한 마음이 현세를 뚫고 하늘에 닿았다. 내 이전부터 너를 지켜보아 그 마음이 하늘을 거쳐 나에게 당도하나니, 내 너의 기도를 현실에 이루어짐이 있게 하리라.]
“누, 누구세요!”
무게감 있는, 그러나 마치 아무런 방해물 없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선명하고 중성적인 목소리.
깜짝 놀란 정동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맡은 요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방금 그건…….”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정동이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난 풍요와 농업의 신 케레스다. 넌 이제부터 나의 권능을 받아,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평안과 풍요를 내리리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요, 숙명이로다.]
“세상에 평안과 풍요를 내리라니. 그게 무슨…… 당신 누구야!”
누군가가 장난치는 것으로 착각한 정동은 허공을 바라보며 마구 소리쳤다.
그런 정동을 다른 아주머니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케레스요, 너에게 사명을 내리고 권능을 빌려줄 자로다.]
“케레스? 그렇다는 말은…… 설마 진짜로 신이신가요?”
가끔 정말로 신실한 목사나 스님들 중에서, 신을 실제로 만나거나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마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말 이 목소리의 정체는 신이란 말인가.
과연 그렇다면 나에게 내린 사명이란, 권능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첫 신도가 될 자여. 나의 신력(神力)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의 권능을 사용해 기적을 일으켜 내 힘을 키우거라. 그리하여 내가 현세에서 다시금…….]
갑자기 끊어져 버린 목소리.
크게 당황한 정동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만 갈 무렵,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김씨 아주머니가 정동의 어깨를 툭 쳤다.
“정동 총각, 갑자기 왜 그래. 이거 다 눌어붙잖아.”
“헉! 아주머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정동의 시야에는, 어느새 상당히 졸아든 고등어조림이 보였다.
“정동 총각, 아까부터 왜 그래? 갑자기 허공을 쳐다보면서 뭐라 혼잣말을 하지를 않나, 소리를 지르지를 않나. 몸이 안 좋으면 영양사님한테 이야기해 줄까? 정동 총각? 정동 총각!”
그러나 잠시 돌아온 정동의 맨정신은 곧 떠오른 무언가에 의해 다시 날아가 버렸다.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정동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정동의 눈앞에는 반투명한 화면 여러 개가 떠다니고 있었다.
[케레스의 권능]
[체력의 회복(F)]
[활력의 증강(F)]
[대지의 요리 솜씨(F)]
[현재 KP : 0]
[현재 MP : 0]
[5MP(Miracle Point)를 모아 신의 힘을 키우세요!]
정동에게, 기적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요리사가 축복을 숨김
지은이 : 김촌지
제작일 :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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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7051-14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