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학 개론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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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비공식회담


세계는 지난 3년 동안 가장 평화로운 한 때를 보냈다.

국제테러, 자연재해, 경제난 등을 완벽하게 막아냈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성과를 따지면 테러국 북한의 무력침공을 사전에 차단한 일이다.

세계인들은 기적이라고 외치며 각국 정상들을 칭송했다. 부정적인 발상으로 관심 끌기 좋아하는 역사학자들도 이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대단하다고.

무력침공에 실패한 북한은 믿었던 중국과 러시아마저 외면하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북한이 남한에 합병된 역사적인 날, 세계의 각국 정상들은 비공식회담을 위해 평양에 모였다.

“한은별 회장.”

“네.”

“우리는 약속대로 당신의 말을 믿기로 했소. 미래에서 왔다는 주장을. 지난 3년 동안 당신이 보여준 행적은 충분한 증거가 되었소.”

“고마운 말씀이군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미녀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전설에 나오는 선녀 혹은 여신처럼 초탈한 분위기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좌중을 압도했다. 이건 외관적인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경지 혹은 계급이라고 할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슴을 쳐다보며 ‘몸매가 참 끝내주시는군요.’ 같은 가벼운 음담패설처럼 불경죄로 지옥에 끌려갈 것 같은 성스러움.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여인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한은별 회장. 정리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오.”

“네. 앞으로 약 5년 뒤에 여러분이 환상이라고 간과했던 세계의 존재들이 차원이동문을 열고 지구를 침공해올 겁니다. 고대신화에 나오는 기적과 괴물, 악마는 고대인들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다른 차원의 현실이죠.”

“손에서 불덩이를 날리고, 뭐 이런 거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침공해오는 10년 뒤에 지구의 인류는 멸종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엘프란 종족의 인류정화정책으로. 저는 그 미래의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질 나쁜 농담 같은 이야기.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그녀가 가르쳐준 미래는 단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 자리에 모인 정상들은 당장 위인전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업적과 명성을 쌓았다.

그렇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떵떵거리며 잘 사는 자신들이 10년 뒤에 죽을 거란 얘기를.

“한은별 회장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오?”

“당연히 대비입니다.”

“핵미사일을 더 늘리란 것이오?”

“아니요. 핵미사일은 폐기해주세요. 아니, 5년 이내에 총기류, 폭발물, 생화학무기는 전부 포기해주세요. 마법에 노출되는 순간, 써보지도 못하고 자폭할 겁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핵미사일 연쇄폭발로 멸망했습니다.”

“그런...”

기가 막혔다.

첨단무기도 없이 외계인을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검과 활로 불덩이 쏘는 괴물들과 싸우라는 건 100번 다시 생각해봐도 억지다.

하지만 그런 비관적인 얘기나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다. 자신들은 바쁜 몸이었고, 이렇게 장시간 모여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나 이곳은 북한. 항복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불순분자가 숨어있으며, 그들에게 이곳은 훌륭한 표적이다.

그런 정상들을 보며 한은별이 말했다.

“저를 납치하려고 시도했던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인류가 앞으로 키워야 할 힘을 약간만 보여드리겠습니다. 프레이야.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미의 여신입니다. 저와 계약한 수호신이죠.”

허공에 인간의 형상이 등장했다.

그녀의 소개처럼 ‘미의 여신’이란 표현에 걸맞은 궁극의 아름다움이 하강한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임에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은색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흔들거린다.

각국 정상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진짜 신(神)이라니...’

그 여신이 한은별 옆에 착지했다.

언짢은 표정만 봐도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건방진 년.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미안해요. 프레이야.”

“흥! 뭐, 좋다. 인간은 늘 그랬으니. 직접 봐야만 믿는 우매함도 옛날과 다를 게 없어.”

정상들은 입을 다물었다.

물리적인 무력시위도 필요 없다.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핵미사일을 껴안고 자면 이런 기분일까.

인간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힘.

그건 ‘신의 힘’이었다.

“신과 계약하려면 자질이 매우 중요합니다. 프레이야는 전생에서도 저와 함께했던 신이기에 바로 깨울 수 있었지만, 나머지 신들은 앞으로 5년 뒤에나 깨어날 겁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계약 이후부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들은 강하지 않습니다.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당할 겁니다. 실제로 전생에선 우왕좌왕하다가 정말 많은 계약자가 죽고 수호신이 소멸했습니다.”

각국 정상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5년, 10년 뒤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경제가 무너지고 질서가 파괴될 것이다. 수많은 사이비종교가 출몰할 것이며, 죽기 전에 뭔들 못하겠느냐는 정신병자들이 사방에서 날뛰리라.

그러니 이 사실이 절대로 밖에 새나가면 안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하면 세계는 다시 한 번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방책은 있소?”

“문화산업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호오...?”

“저는 내년부터 앞으로 닥칠 미래와 유사한 가상현실게임, 판타지소설, 영화를 연달아 출시할 겁니다. 여러분을 모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5년 뒤, 세계인이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협조 부탁합니다.”

“흠...”

“여러분께도 절대로 나쁜 제안이 아닐 겁니다. 특히, 이 게임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자들은 지구의 새로운 권력자로 자리 잡게 될 테니까요. 이 또한 정해진 미래입니다. 그리고 하나만 충고하자면 협박이나 세뇌는 관두세요. 신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한은별의 설명은 그걸로 끝났다.

할 말을 마친 그녀는 퇴장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자리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한심한 작자들!’

지구의 미래보다는 자국과 자신의 이득을 궁리하는 모습이 혐오스럽다.

형태는 다르지만, 전생에서도 그랬다.

지구는 누군가 지켜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권력투쟁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은 지구는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한은별 회장.”

“네.”

“질문이 있소. 미래를 아는 당신이라면 유능한 인재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오. 그들을 설득해서 힘을 모으면 5년 뒤에 세계를 지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걸로 보는데. 세계경제가 당신의 손에 넘어갔듯이. 내 추측이 틀렸소?”

“맞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런 대가 없이 3년이나 우리를 도와줬소. 그리고 기껏 한다는 부탁이 문화산업 권장이오. 허! 게임? 솔직히 말하지. 이런 번거롭고 유치한 수단을 쓰는 당신의 진의가 의심스럽소.”

한은별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질문한 자를 죽이려는 수호신 프레이야를 서둘러 말렸다. 여신의 손에서 튀어나온 창에 머리가 꿰뚫릴 뻔한 남자는 사색이 됐다.

한은별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아련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답했다.

“한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남자? 남편 말이오?”

“...정말 꿈 같은 추측이군요. 한순간이지만 설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못난 저를 구해주시고 과거로 돌려보내신 은인입니다. 제 목적은 지구 어딘가에 있을 그분을 5년 이내에 찾는 겁니다. 절대로 찾지 말라고 하셨지만...”

“못 찾으면 어떻게 되오?”

“미래가 틀어지지 않는다면 13년 뒤에 다시 뵐 수 있겠지요.”

“13년?”

“네. 맞습니다. 인류가 멸망한 이후입니다.”

“......”

“그래서 저는 그분이 다른 차원으로 수행을 떠나시기 전에 찾을 계획입니다.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지구의 인류는 앞으로도 쭉 존속될 겁니다. 저는 여자고 그분은 남자니까요.”

“그런...”

“이만 실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