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 대한제국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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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대치 정국 (1)




20XX년 대한민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20XX년, 김종일 국방위원장이 주창하던 강성 대국 건설이 현실이 되었다.

전 주민에게 쌀밥을 배불리 먹여 주겠다는 불가능과 같던 대를 이은 공약이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유전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남포 앞 서한만(西韓灣)에서 이란의 매장량을 뛰어넘는 막대한 양의 원유가 매장된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2011년, 김종일 국방위원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끝에 중국과의 경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대외적으로는 압록강 강변의 황금평과 위화도 개발 계획만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방중 협상에는 서한만 유전 개발의 협상도 숨어 있었다.

이후 북한 정부는 중국과 서한만 유전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XX년 하반기 매장량 2백억 톤, 가채 매장량 70~80억 톤인 초대형 유전을 찾아냈다.

서한만에 막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D 그룹 김우종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 북한과 극비 접촉을 했었다. 그러다 그룹이 공중 분해되면서 그의 꿈이 좌절되었다.

1998년 정준영 H 그룹 회장의 방북 때, 김종일 국방위원장이 개발을 공식 제의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H 그룹의 회사 사정으로 이 문제는 다시 덮어졌다.

그러던 2007년, 대통령의 방북 때 또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남북경제협력에 적극적이었던 대통령은 이 제안을 적극 받아들였다. 양측 정상 사이에 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부총리를 대표로 한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 가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이후 출범한 보수 정권의 정략적 선택으로 남북 관계 경색이 이어지면서 다시 묻혀 버렸다.

몇 번의 좌절을 거치면서 북한은 남한과의 공동 개발을 포기했다. 그들은 강성 대국을 완성해야 하는 중차대한 목적이 있었기에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성 대국 완성을 이유로 몇 년간 협상 끝에 서한만 유전 개발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이 대가로 북한은 엄청난 자금을 중국으로부터 선지급 받았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북한은 국제 곡물 시장에서 쌀과 밀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수입된 양곡이 들어오기도 전에 김종일이 급서했다. 이후 북한 권력은 김종은에게 넘어갔다. 불안하게 권력을 이은 김종은은 확보한 식량을 정권 유지에 적극 활용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중단되었던 식량 배급을 전격 실시한 것이다. 그동안 북한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식량 배급은 새로운 권력자와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급작스러운 김종일의 서거로 대내외는 우려의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한은 그런 우려를 다시 실시된 식량 배급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며 급격히 안정을 찾았다.

이어서 서한만의 유전이 터지면서 북한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유전 개발은 북한 민심을 급격히 결집시켰다.

남한도 마냥 손 놓고 있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이후 두 번에 걸쳐 보수 성향의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서한만의 유전 개발에 자극받은 보수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는 제쳐 두었다. 대신 황해에서의 유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드디어 빛을 발했다.

남한은 서한만 유전이 발견된 뒤로 황해 일대에 대대적으로 유전을 탐사해 왔다. 그 결과, 드디어 백령도 해안에서 대규모 해저 유전을 발견한 것이다.

백령도 유전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었다.

중국은 1980년대 초 발해만 유전을 개발했다.

이 당시 중국은 해저 유전 개발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초대된 것이 노르웨이 유전 기술자들이었다.

이렇게 초대된 노르웨이 기술자들은 발해만에서 성공적으로 해저 유전을 발견했다. 이에 고무된 중국은 황해 일대의 유전 탐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노르웨이 기술자들이 찾아낸 것이 서한만이 아닌 백령도 일대의 유전 가능성이었다.

중국은 이러한 사실을 비밀에 부쳤었다.

그러나 북한도 눈과 귀는 있었다. 중국에는 특히 북한에 우호적인 인사가 많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백령도 탈환 작전을 펼쳤다.

백령도 일대에 설정된 해상 군사 분계선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19XX년 가을, 급기야 일방적인 해상 군사 분계선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공공연하게 군사 도발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한은 강력히 대응했다. 국지전까지 벌어졌지만 남한은 북한의 도발을 단호히 격퇴하면서 해양 영토를 수호했다.

그런데 백령도 유전의 위치가 미묘했다. 발견된 유전이 우리의 북방한계선(NLL)과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 군사 분계선과 겹치는 지역인 백령도 남포리 앞바다 5킬로미터 해상이었던 것이다.

양측의 군사력이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매장량만큼은 북한 서한만 유전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양이었다.

유전이 발견되자 북한이 펄쩍 뛰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해상 군사 분계선을 이유로 유전 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면서 경고했다.

만일 자신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전을 개발할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경고와 함께 유전 개발 중지를 격렬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남한 측 사정이 그 말을 들어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한때 떨어졌던 국제 유가가 지속적으로 올라 100불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백령도가 비록 남북 간 군사적인 다툼이 있는 최전방이기는 하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원유를 그냥 묻어 두기에는 남한 사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

남한은 북한에게 강온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

다양한 방향으로 협상을 시도하면서 유전 개발에 박차를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지속적이고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군사 대치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자 정부는 급기야 결단을 내렸다. 백령도 주민들에게 인천 일대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대부분의 주민을 이주시킨 것이다.

그런 뒤 백령도 일대에 병력을 증강했다.

이미 주둔하고 있는 해병 6여단에 2011년 창설된 서북도서방어사령부 직할 부대로 창설된 육해군 연합사단을 추가로 배치했다.

동시에 백령도에서의 방어 개념의 군사 전술도 대폭 수정했다.

연합사단은 유사시 해안 상륙도 가능한 부대였다.

병력 대부분이 부사관 이상 간부로 보임되어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연합사단은 육군의 특공여단과 해병대의 2개 연대가 주력이었다.

여기에 수리온 전투비행단과 해군특수전여단의 1개 대대(UDT/SEAL)와 공병여단, 그리고 각 급 사단 직할 부대가 편성되었다.

육군과 해병대가 각자 독자적인 작전 수행 능력도 갖춘 막강 전력의 최정예 부대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백령도 일대 해상에는 새롭게 편성된 서북도서방어사령부 직할 함대를 상시 배치했다.

백령도 유전이 개발되면서 황해 유전 개발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래서 해군은 편제를 재편해 서방사의 직할 함대를 막강 함대로 만들었다.

유전이 발견되자 북한의 위협에도 유전 개발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중화동포구 앞바다에 인공 섬을 만들어 해상 원유 정제 시설을 갖추었다. 그리고 포구 옆의 절벽 안쪽에다 저유 시설도 구축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포구에 수십만 톤의 원유 수송선이 정박할 터미널도 만들었다.

민간인 대부분이 섬을 떠나면서 백령도는 섬 전체가 완전히 군 요새화되었다. 이로 인해 원유 관련자들과 군 관계자와 군인가족들이 새로운 섬 주민이 되었다.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20XX년 9월이었다.

최초의 원유와 정제유를 싣기 위해 10~20만 톤 급 대형 유조선이 백령도로 몰려왔다. 한국에서 최초로 상업 생산을 개시하면서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적극 홍보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북한의 도발을 그나마 막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유조선이 몰려오게 하였다. 원유 터미널에는 지금 두 척의 20만 톤 급 유조선이 정박해 대기하고 있었다.


***


백령도 유전이 상업 생산을 시작하기 1년 전, 북한 최고 권력자 김종은이 당과 군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김종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자제하라고 촉구했는데도 남조선의 백령도 유전이 상업 생산을 곧 시작한다고 합니다. 우리 북조선 해역에서 버젓이 유전을 개발하고 있는 남조선의 작태가 이제 도를 넘은 것 같습니다. 여러 동지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 주시오.”

호위총국장 리영훈 차수가 발언했다.

“남조선을 무조건 응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놔두었다가는 우리가 엄포만 놓는다고 무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인민무력부장 김경춘 차수가 우려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백령도 유전에 군사적 타격을 주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칫 우리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남조선을 응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가적으로 최대한 실익을 고려하면서 대처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용철 당통일전선부장도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남조선 정권이 상업 생산을 강행한 점은 강력히 비난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놓고 물리적 타격을 가한다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전같이 국가 경제가 어려웠다면 군사적으로 맞서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 북조선은 위원장동지의 탁월한 영도 아래 체재를 정비해서 강성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좀 더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병주 내각 총리도 나섰다.

“직접 타격을 가한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남조선의 능력이라면 바로 복구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타격의 영향은 단기간에 불과하고 감정만 쌓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속적인 타격을 주는 일은 전면전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그동안 남조선과 경색된 경협의 물꼬를 풀어 실익을 얻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좋을 듯합니다.”

이 뒤로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발언했다. 대부분의 발언은 물리적 타격보다는 국가적으로 실익을 얻는 방향으로 가자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김종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최대 치적인 서한만 유전에 도전하는 백령도 유전을 응징하고 싶었다.

이날의 회의는 별다른 결말 없이 끝났다.

회의를 산회하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고심을 하던 때 김종은의 최측근인 황영서 차수가 변용민 국가과학원장 함께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위원장 동지.”

“어서 오시오.”

김종은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러시아에 다녀오셨다고요?”

황영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러시아에 가서 전자전에 관한 장비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김종은이 물었다.

“뭐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까?”

과학원장 변용민이 대답했다.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특이하고 획기적인 무기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

“획기적인 무기? 그게 무엇인가요?”

“새로운 개념의 폭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변용민 원장이 붉은 줄이 그어진 안내 책자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런 뒤 책자에 나온 폭탄에 대해 설명했다. 김종은도 폭탄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어서 그의 설명을 쉽게 알아들었다.

“EMP탄이라면 전자기 펄스를 이용하는 것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 폭탄은 러시아가 이미 미국보다 기술력에서 앞서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요?”

황영서 차수가 대답했다.

“그렇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