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화
서장. 부서진 희망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리곤 이따금 지나간 과거들을 회상하며 ‘그때, 이렇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그때, 좀 더 열심히 했으면 어땠을까?’하고 후회하곤 한다. 참으로 헛된 생각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망상.
그래, 망상이다.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결과는 벌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이상 백날 생각해봤자 점점 더 짙은 후회감만 곱씹게 될 뿐,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기에 길혁진은 그런 망상이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애써 현재에 집중하려고 하곤 했다.
물론, 잘되지 않았다.
그 망상이라는 것은 결국 눈앞의 현실을 보기 싫기에 하는 것인데, 눈 앞에 펼쳐진 비참한 현실에 애써 집중할 때마다 오히려 그것이 트리거(trigger)가 되어 또다시 망상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혁진과 같은 장소,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망상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그런 시대였다.
사람 사이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오직 지나간 황금 같은 과거의 기회에 대한 후회만이 남은 시대. 물론, 안 그런 이들도 있었겠지만 최소한 길혁진이 아는 사람들은 내색만 안 했을 뿐 크고 작은 후회 속에 살고 있었다.
‘그 후회만 가득했던 때가 그립게 느껴진다니…… 참 아이러니하군.’
한차례 마른 웃음을 지은 후, 혁진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백색의 사막. 공해(公害)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맑고 깨끗한 남색의 밤하늘엔 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고, 그 하늘 한편엔 현실의 달보다 지름이 10배 이상 커 보이는 백색의 초승달이 걸려있었다. 참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악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화통을 끼운 지 5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맛이 갔군. 역시, 워프에 내성이 없는 일반 장비로는 부족한 게 많아.’
입안에서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식감에 혁진은 쓰고 있는 방독면의 방화통을 뺀 후, 입안에 있는 점액질을 뱉어내고 곧바로 검은색 롱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여분 정화통을 꺼내 갈아 끼웠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모래 먼지들, 이건 평범한 먼지가 아닌 일종의 독이었다.
생명체의 타액과 접촉하면 끈적거리는 엑토플라즘(ectoplasm) 점액질로 변해 점점 폐에 쌓이는 이형 물질, 속칭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고 불리는 물체다.
워프 에너지에 저항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흡입한 뒤 5분 이내에 기침을 시작하고 점점 숨이 막히다가 30분 이내에 질식사한다.
‘아무리 워프 에너지를 다루는 이라 한들 특별한 훈련을 받지 못하면 이런 환경에서 계속 버티는 건 한계가 있지. 빨리 녀석을 찾아야겠어.’
롱코트에 달린 후드를 다시 푹 눌러쓴 뒤, 혁진은 모랫바닥에 나 있는 발자국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 크기를 볼 때 어린애의 것이었다.
코가 둥글고 발꿈치 쪽이 깊이 들어간 것을 보면 낮은 굽 구두를 신고 있는 여자아이. 지면의 단단함과 발자국의 깊이를 따져봤을 때 체중은 대충 35kg 정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곳에 들어온 여자아이는 이미 죽었을 것이 뻔했다.
별다른 생존 장비가 없는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곳,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건만 여기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아주 위험한 괴물까지 있다.
여자애가 사라진 지 4일이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한다.
하지만, 혁진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작은 발자국을 따라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죽은 여자아이의 시신을 찾아 부모에게 가져다주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서?
아니다. 혁진은 이미 죽은 시체를 찾는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멍청하지도, 감수성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찾는 것이 평범한 여자아이였다면 혁진은 이미 죽었다고 결론 내리고 아예 이 던전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런 그가 이렇게 몸소 여자아이를 찾기 위해 이 마경(魔境)에 들어온 것은 이 발자국의 주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원자다.
축복받은 재능과 거룩한 희생을 통해 앞으로 인류를 구해낼 영웅, 그렇기에 혁진은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워프 에너지에 관한 재능은 인류의 정점 중 하나, 적대적인 환경이지만 그녀 정도의 재능이라면 본능적으로 워프 에너지를 이용할 것이고 그럼 이 극한환경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생존할 수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혁진이 기억하는 마지막 미래의 장면에서 그녀는 그의 곁에 있었고 그 말은…….
‘나처럼 롤백(Roll back)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1년 전, 이뤄지지 않아야 할 헛된 망상이 현실이 되어 혁진에게 찾아왔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되감기는 것처럼 43년 전으로 돌아간 세상, 혁진은 소년이 되어 있었고 후회로 가득 찼었던 과거는 전부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 혁진은 왜 자신에게 롤백이 일어났는지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회귀하기 직전 그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난 만큼 그녀에게도 일어났을 수 있었다.
‘분명 살아있을 거다. 어쩌면 던전을 닫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육체의 나이는 어리더라도 재능과 지식, 경험 삼박자가 완벽하게 다 갖춰졌으니까. 아니, 설령 롤백하지 않았더라도 생존 가능성이 커. 본능적으로 암흑 계열의 워프 에너지를 다루는 그녀는…….’
발자국의 주인을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혁진은 덜컥 발걸음을 멈췄다.
이유는 바로 앞에 나 있는 발자국의 흔적, 지금까지 고르게 찍혀 있었던 발자국이 급격하게 흐트러졌다.
깊이도 들쭉날쭉한 데다가 보폭도 2배 이상 길어졌고 앞쪽엔 한 차례 쓰러진 흔적까지 보였다.
곧바로 후드를 벗고 방독면을 들어 올린 후, 혁진은 코로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생명체 특유의 노린내는 없다. 게다가 바닥에 있는 관찰 가능한 흔적까지 없다.
공중에 떠 있는 괴물에 의한 습격일 확률이 높고, 주위에 널려있는 끈적끈적한 암흑 계통의 워프 에너지를 생각하면…….
‘젠장!’
다시 방독면을 쓴 후, 혁진은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첫 번째 모래 언덕을 넘고 두 번째 모래 언덕 위에 올랐을 때, 혁진은 앞의 모래사장에 쓰러진 조그만 인영을 찾을 수 있었다.
천천히 모래 언덕을 내려간 후, 혁진은 쓰러진 인영과 살짝 떨어진 장소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건어물처럼 바짝 마른 여자아이의 시신.
외상은 딱히 보이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혁진은 어느새 자신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답답한 마음에 결국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던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귀한 뒤에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는 욕설, 그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혁진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롤백했다면 이런 곳쯤은 혼자서 오래전에 나왔을 것이고 애초에 실종신고가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그녀를 찾으러 나선 것은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건만…… 소망과는 달리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니키 말코바(Nikki Malkova), 검은 마술의 대가. 어둠 속의 희망. 검은 마녀.”
천천히 고개를 내린 후, 혁진은 말라비틀어진 유해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앞으로 38년 뒤, 인류를 구해낼 8명의 영웅 중 하나. 그녀가 죽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이런 하찮은 곳에서.
대체할 수 없는 인류의 희망이 아닌, 무기력 12살의 체코 소녀로서.
혁진은 잠시 제자리에 선 채 과호흡 환자처럼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롤백 전, 계속된 전투와 향정신성 마약남용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줄만 알았던 감정이 오랜만에 분노와 울분으로 들끓었다.
‘내가 미적거리지 않고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한 달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아니, 다시 한 번…….’
손을 꽉 쥔 채, 후회를 곱씹고 있다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 그리고 잠시 뒤, 혁진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는 킬킬 웃었다.
롤백, 다른 표현으론 시간 역전 혹은 시간 회귀. 그 악랄한 기적 덕분에 예정된 구원이 박살 났는데, 또 기적을 또 바라고 있다니. 아무래도 몸이 젊어지면서 좀 많이 멍청해진 것 같았다.
잠깐 웃음을 터뜨린 후, 혁진은 얼굴을 싹 굳히고 결국 꽃피지 못한 구원자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좆같은 기적은 이젠 이쪽에서 사양이다.
‘……냉정하게. 정신집중.’
입안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비릿한 피를 핥은 후, 혁진은 방독면을 쓰기 전부터 혓바닥 아래에 넣어놓은 알약을 씹어 삼켰다.
알약이 터지면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 입의 점막을 통해 스며들고 순식간에 뇌를 잠식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혁진은 외투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연고 통을 꺼내, 그 안에 있던 진득한 검은 기름을 검지와 중지로 듬뿍 퍼서 가검(假劍)의 뭉툭한 날 위에 퍼 발랐다.
블랙 실버(Black Silver).
사특한 것을 죽인다는 속설을 가진 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기름. 지금 바닥에 죽어있는 그녀가 고안해냈었어야 할 역작. 기름을 바른 후, 혁진은 곧바로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향해 가검을 휘둘렀다.
그의 몸 안에 있는 워프 에너지의 일부가 가검에 들어가고, 뭉툭한 날에 몰려들어 날카롭게 각을 세운다.
잘 갈린 식칼처럼 부드럽게 물체를 절단하는 가검.
혁진이 휘두른 검이 소녀 시신의 목을 절단하자 말라비틀어진 소녀의 머리통이 소름 끼치는 기성을 내뱉으며 입에서 검은 연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자투리는 쳐내고.’
모습을 드러낸 악령을 향해 혁진은 빠르게 근육을 수축시키며 연이어 검격(劍擊)을 날렸다.
베기 용 짚단처럼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검은 연기. 블랙 실버를 바른 물체는 물리적으론 타격을 입힐 수 없는 영체(靈體)를 타격할 수 있다.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초자연적 힘인 워프 에너지를 쓰지 않는 이상, 우월한 현대화기로도 저항할 수 없는 괴물이 무기로 때려죽일 수 있는 괴물로 격하되는 것이다.
한 천재가 고안해낸 이 기름 하나로 20년 뒤의 세상은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해졌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었으니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다음은 충격파.’
토막 난 검은 연기가 서로 뭉쳐지기도 전에 혁진은 기묘하게 손가락을 꼰 왼손을 뻗었다.
동시에 왼손 앞의 공기가 둔중한 울림과 함께 터져나간다.
압축된 공기가 급격하게 풀려나는 듯한 형상, 급작스러운 충격파에 말라비틀어진 소녀의 시신은 하얀 모래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갔고 허공에서 뭉클거리던 검은 연기는 잠깐 사이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눈알만 한 크기의 검붉은 색의 빛 덩어리 한 쌍이 드러났다.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지은이 : A사과
제작일 : 201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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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김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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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305-02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