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화
1. 회한에 잠기다
대륙에 큰 전쟁이 있었다.
마왕을 추종하는 자들이 결국 마왕을 소환해 버린 것이다.
그 전에도 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패권 다툼을 위해서 전쟁 중이었지만, 마왕의 강림은 과거와는 많이 달랐다.
마족들의 침공에 여러 종족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전쟁을 시작해야 했으니까.
그러한 전쟁은 수십 년을 이어갔고, 사람들은 차츰 절망해 갔다.
그러나 희망은 존재했다.
강대한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가 나타난 것이다. 세상은 거의 황폐화 되었지만, 그래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받았다.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비록 크나큰 상처가 남았지만.
* * *
제이스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약간은 훈훈한 바람을 느꼈다.
때는 이제 봄이다.
겨울이 물러가고, 훈풍이 다가온 시기.
이때는 모두가 농사로 바쁜 시기이기도 했지만 제이스는 걱정이 없었다.
꼬물꼬물.
흔들의자에 앉은 제이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 모양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땅은 저절로 뒤집히고, 밭고랑의 모양을 잡아나간다.
그것은 바로 대지의 정령.
땅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조작하는 권능을 가진 대지의 정령이 밭을 개간하고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은 분명 신기한 일이었으나, 제이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최상급 정령사로서 인간계의 대전쟁과 마족과의 수 십 년 전투를 이겨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령사 제이스.
그는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아니, 평탄하다고 하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동시대에 살던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그것이 제이스에게 평탄함의 기준이 되었다.
그의 나이 이제 쉰이었다.
그가 50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대륙에서 그와 비슷한 나잇대의 인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삽 십 년 전.
그가 아직 미숙한 정령사였을 때부터 대륙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예슬레인 제국과 헤스트 왕국의 무역 전쟁이었다.
그것이 전 대륙으로 확산되고, 대륙에는 제대로 된 나라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혼란의 시대였다.
그 전쟁의 시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눈을 떠 보니 상급 정령사가 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마왕의 강림.
제이스는 그제야 최상급 정령사가 되었지만, 그의 힘으로도 마왕의 군세는 막아내기 힘들었다. 제이스는 자신의 목숨도 보살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상급 정령사인 자신이 이러한데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리던 때.
갑자기 나타난 불세출의 용사가 마왕을 무찔렀다.
그것은 제이스에게 안도감을 주기도 했지만, 허탈감을 주기도 했다.
마족 군에게 대항하여 얼마나 많은 친인을 잃었던가?
마왕을 쓰러트리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그를 이 대륙에서 쓰러트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점점 지치고 절망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의 힘으로 단숨에 해결될 줄이야.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제이스는 그들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냈다.
지금은 이렇게 은퇴해서 농사나 짓는 일상을 지내고 있는 시골 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의 최상급 정령사가 가진 능력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았다.
용사 같은 거창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상급 정령사는 일국에서 공작의 직위를 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번잡한 것도 싫었고, 친인도 모두 잃어 혼자인 그는 귀족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은퇴한 후에는 작은 마을에서 텃밭을 일구고, 은퇴 자금으로 모아온 돈으로 한 끼 두 끼나 때우며 마을의 소일거리를 도맡아 하며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조차 시들해지고 아무 의미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쉰이라는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릴 정도로 많은 고생을 했다. 그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은 것뿐.
그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던 날은 소중한 아내가 죽고 홀로 살아남은 날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도 못했고, 남긴 업적도 없고. 그저 살아남기만 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기만 했지만, 종종 웃긴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정령왕의 소환.
은퇴해서 밭이나 갈던 그에게 정령사라면 꿈에나 그리던 정령왕과 계약을 하게 된 기연이 온 것이다. 소환 시간은 불과 10초도 안 되지만 정령왕과 계약을 함으로써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손에 넣었다.
하나 그래서 뭘 할 수 있을까.
“지금에야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게 되면 뭘 해.”
구해야 했던 아내도, 친우들도 이미 죽어 고혼이 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뒤늦은 힘일 뿐이다. 이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정령술의 수련도 하지 않는다. 이제 힘을 키울 필요조차 없으니까.
제이스는 지나간 날을 회상할 때마다 그들을 구하는 상상을 했다.
하다못해 영웅의 동료가 되어 마왕을 죽이던 장소에 그가 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망하네.”
그렇다.
모두 허망한 일이다.
그는 허망한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고, 감기지 않는 씁쓸한 눈을 감았다.
“그래, 내일은 양자라도 구해 볼까. 이제 정령력이 좋은 아이는 흔치 않은데.”
내일 할 일을 간신히 머릿속에 떠올린 채, 억지로 잠을 이룬다.
내일도 이런 일상이 계속될 거란 공포가 머리에 맴돌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삶에 대한 분노와 외로움이었다. 아직 죽기에는 이른 나이, 그러나 뭔갈 해야겠다는 의욕조차 잃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남자가 바로 제이스였다.
그래도 잠이 들어 과거의 시간 속에서 꿈을 꿀 때는, 여느 때와 같은 행복한 꿈을 꾼다.
제이스는 착잡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느긋한 잠으로 도피했다.
2. 돌아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이스는 온몸에서 샘솟는 활기를 느꼈다.
‘무슨 일이지?’
이제는 정령의 치유수를 아무리 먹어도 효력을 보기 힘든 나이였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그는 기지개를 피며 자연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으응?”
제이스는 경황이 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틀 전 문가에 걸어놓은 토끼 가죽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토끼 가죽이 문제가 아니다.
집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뭐야, 납치라도 당한 겐가?”
하지만 최상급 정령사인 자신이 납치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장소였다.
제이스는 자신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있는 공간을 살폈다.
“설마.”
재차 돌아보고 깨달았다.
제이스는 놀라 멍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렸다.
이곳은 자신이 십 대 전반을 보냈던 작은 치료소였다.
“……그래, 꿈인가…….”
그리운 장소의 모습에 제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시기.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였다.
제이스는 고아였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유리걸식하며 대륙을 떠돌았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보고 들은 게 많았던 시절이다.
그러다 산중에서 눈먼 멧돼지에게 걷어차인 제이스는 그대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산에서 엘프 아레이아스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여행 중이던 엘프 아레이아스는 제이스를 치료해 주었다.
조그만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며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 광경은 어린 제이스가 보기에 굉장히 신기했다.
제이스는 아레이아스가 움직이는 정령의 자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제이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아레이아스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레이아스의 가르침은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제이스는 아레이아스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결국, 제이스는 최하급 물의 정령밖에 소환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르침을 받은 시간도 짧았다.
하지만 그것은 행운이었다.
보통의 고아들은 엘프를 만나기는커녕 고아원에서도 보살핌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니까.
나약하게나마 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갈 힘을 받았다.
제이스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녀였다.
아레이아스는 제이스가 최하급 물의 정령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뒤에도 잠시나마 그를 보살펴 주다가 떠나갔다.
쉰이 넘어가는 나이가 된 지금도 사실 긴가민가하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정령술과 보살핌을 베풀었는지.
엘프라는 종족 특성상 그들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웬만해선 없었다.
사람들은 제이스가 술김에 얘기하는 정령술을 배우던 때의 일과 엘프 아레이아스에 대해서 허풍으로 생각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심지어 그의 아내가 살아있었을 때도 믿지 않았다-지만 그녀가 은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지만.
이후 제이스는 여기저기에서 어린 소년 정령사로서 떠돌아다녔다.
최하급 물의 정령사라고 해도 용병으로 치면 B급으로 통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이유는 별것 아니다.
신관을 제외하면 물의 정령사만이 상처를 치료하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처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이적의 힘을 가진 신관과 물의 정령사는 아주 적고 귀중했다.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게 용병으로 떠돌던 제이스는 충분한 자금을 제법 모아 어느 한 도시에 정착했다.
항구도시 생트리어.
이곳은 예슬레인 제국의 제2 항구도시이면서 헤스트 왕국과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에 상업적으로도 발달해 있다.
예슬레인 제국과 헤스트 왕국의 무역이 활발한 만큼 물건들을 호위하는 용병의 왕래도 잦았고, 자연적으로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제이스는 혼란스럽고 막막했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제이스는 항구도시 생트리어에 적응할수록 인간적인 삶에 녹아들었다.
‘당시에 최하급 정령사인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제이스는 자신이 가진 정령술을 활용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배를 곯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소환할 수 있는 최하급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정령의 치유수를 만들어 팔면 돈이 꽤 되었던 것이다.
비록 친구였던 정령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는 것에는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엘프와 인간인 자신의 차이점이라고 납득했기에 거리낌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 테니까.
제이스가 만든 정령의 치유수는 한 병에 약 40실버 정도의 가격으로 팔렸다.
하급 치유 물약 정도의 효과를 지녔지만, 그런 물건도 한 병에 2골드가 넘는 물건이다. 그런 물약 한 병이면 4인 가족이 아끼고 아껴서 2달에서 3달까지는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 정도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효과도 비슷한 제이스의 치유수가 잘 팔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생트리어였다.
상처 입기 쉬운 용병과 뱃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정령사는 회귀로 꿀빤다
지은이 : 차석원
제작일 : 2017.05.26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배성림
표지 : 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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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460-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