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첫화면으로 가기
헤더배너
분야보기



닫기
이벤트 기간 : 2013년 5월 9일 ~ 5월 31일
 

이스라엘 구석의 시골에서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엄마와 함께 사는 소년의 이야기. 소년은 아빠가 없는데, 그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아빠임을 자처하는 남자가 세 명이나 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이 살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인 야콥은 29년 동안 ‘아들’을 단 네 번 초청해서 밥을 먹었을 뿐이다. <네 번의 식사>라는 제목은 그런 의미다. 그럭저럭 그럴듯한 설정이지만 딱히 눈길을 끌지는 않는다. 놓치기 쉬운 소설이라는 얘기다. 놓치지 마시라는 얘기다. <네 번의 식사>는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사랑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방식의 연애담이었다가 마르케스 류의 마술적 리얼리즘이었다가 아주 꿈처럼도 변했다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걸맞게) 성경의 수난극 구조를 빌려온 숭고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이렇게 ‘발생하는 모든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게 완연한 뻥으로 느껴질 법한데, 작가의 솜씨가 노련하다. 변화무쌍하는 드라마의 배경인 시골 마을은 연극 무대처럼 휙휙 바뀌질 않고 육체노동과 권태 사이에서 적절히 황량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 단단한 배경을 딛고 선 등장인물들의 굳건한 캐릭터는 어떤 허황된 꿈과도 관계없어 보인다. 다만 의지가 있을 뿐이다. 초현실적인 상황까지 씹어 삼키는 민중의 강인한 생활력과 그들의 열렬한 사랑은 판타지를 지상에 못박아버릴 정도로 강렬하다. 이 소설의 미덕은 이게 다가 아니다. 메이어 샬레브는 여기다가 풍부한 감각 묘사와 잠언과도 같은 명대사들을 딸기 씨처럼 빽빽하게 박아 놓았다. 따라서 <네 번의 식사>는 산자락에서 허기져 먹는 라면처럼 강렬하고도 풍부한 감동을 선사하는 소설, 그래서 슬퍼도 슬프지 않은 소설이다.
각종 리얼리즘 애호가 / 요즘 부쩍 감동의 온탕에 빠지고 싶다 / 나 예전에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 보고 울었는데...
300페이지 넘는 소설은 죽어도 못 읽겠다 / 메타포 중독자 / 거짓말. 사랑은 다 거짓말이야
 
책 띠지를 보면 ‘SF의 선구자 루키아노스’라고 표기돼 있다. 2세기 경 살았던 사람이니까 SF를 썼다면 과연 선구자이기는 하겠다. 그러나 (특히 하드 계열) SF 팬들에게는 안된 소식이지만, 여기에 기발한 과학적 설정이나 장치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21세기를 사는 인간들에게 이 책의 표제작 ‘진실한 이야기’는 마치 우주의 경계처럼 끝없이 확장되는 상상계의 온갖 양태를 구경하는 재미가 우선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인상적이다. 선구적이다. 화려한 상상계를 구경하는 재미가 이 작품의 존재 이유라는 점 말이다. ‘진실한 이야기’는 온갖 모험 에피소드들의 나열이라는 점에서는 <오딧세이아>같은 그리스/로마 고전 모험 서사들의 후예지만,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어떤 목적에도 소용되지 않는다. ‘진실한 이야기’ 속의 세계는 사건의 직렬로 이루어졌을 뿐, 거기에는 어떤 운명적인 결론, 즉 ‘그리 되었어야 하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매 순간을 겪는 것이고 세계는 사건을 던져줄 뿐이다. 논리와 (당위로써의) 운명이 부재하는 이 공백의 세계는 되려 20세기 포스트모던 소설들이 선대의 신화와 우화에서 뒤늦게 발견한 ‘목적 없는 세계’라는 깨달음을 이미 품고 있다. 물론 ‘진실한 이야기’의 상상력은 그 자체로 멋지기 때문에 즐기기만 해도 된다. 집채만한 거미가 밤하늘의 별들을 은빛 거미줄로 빼곡히 이은 뒤에 그 빛줄기 위를 보병들이 걸어 다니며 날짐승들과 싸우는 장면, 그리고 ‘등불들만이 살아있는 별’에 도착한 주인공이 자기 집 등불과 꼭 같이 생긴 등불에게 지구의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장면 등, 후대의 환상 소설가들이 썼다고 해도 손색없는 멋진 아이디어들이 가득하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읽고 나서 루키아노스가 천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짜로.
SF의 영역 확장에 목말라 있는 SF팬 / 고전의 바다로 향하고픈 판타지 팬 / 족보 없는 상상력의 힘을 느껴보고픈 순문학 팬
이름 외기 어렵기는 러시아놈들이나 이놈들이나 (한숨) / 그리스 신화 족보는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쩌다 한 세대 이전의 작가로 취급받고 있을까. 나는 그가 ‘소설’을 거의 남기지 않은 역사 논픽션 (특히 전기) 전문 작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문학사가 가장 홀대하는 분야의 거장이었다(그렇다고 역사학에서 츠바이크가 언급될 일은 더 없지만). 슬픈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그의 최고 강점을 말해보자. 집착에 가까운 심리묘사다. 츠바이크는 염라대왕처럼 등장인물들의 순간순간을 모두 체크한다. 잠시의 망설임이나 잠깐의 오해, 선의의 거짓말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기록된다. 따라서 츠바이크의 소설들이 대개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점은 논리적인 결과다. 츠바이크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분명히 패배한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유도하고 또 그것을 희망하더라도 사소한 순간들의 작은 오류까지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츠바이크의 세계 속에서 완전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불완전함의 작은 틈새마다 무거운 운명의 추가 삽입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쌓인 것들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겠다. 이것은 강요된 주제가 아니라 츠바이크의 집요한 심리 묘사가 필연적으로 귀결시킨 결론이다. 우연이건 의도되었건 간에 작가의 강점 또는 접근법이 작품의 주제와 일치했고, 그 어찌할 수 없는 파멸에의 결론이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낀 시대의 불길한 예감을 불러냈다. 어떤 소설의 내/외적 측면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시대를 향한다는 것. 더 이상 필요한 게 있는가? 츠바이크는 놓치면 안되는 작가다.
19세기말-20세기초 영국산 고전 로맨스 팬 (도전하세요!) / 묵직한 한 방 원합니다 / 그래 우리는 헤어졌지만 딱히 내가 특별히 나쁜 건 아니었어
인생이 그렇게 무서운 것일 리 없어요 / 스킨십 없..다시피 합니다 / '로설' 아녜요
 
여러모로 흠잡을 데 없는 경찰 스릴러. 형사 로건 맥레이 시리즈의 첫 이야기다. 주요 소재가 유아 성범죄 연쇄살인이라는 것만 두고 보면 좀... 그렇다. 범죄 방식과 범죄자의 잔혹성이 점점 부각되면서 스릴러 소설들이 일종의 정서적 괴멸 상태에 빠져가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 것 말이다. 특히 잔혹함을 주 소재로 삼는 스릴러 시리즈의 경우 점점 현실감을 잃으면서 일종의 ‘하드코어 판타지’같은 느낌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로건 맥레이는 다르다. 안심하셔도 좋다. 주 소재가 잔혹한 사건이고 배경 도시가 삭막한 광업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콜드 그래닛>에는 인간적인 훈풍이 감돈다. 작가는 특정 장면에의 집착적인 묘사보다 개성 있는 경찰 캐릭터들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며,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주인공인 로건 맥레이를 비롯한 강력반 동료들에게 호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이들은 대단한 천재들도 아니고 유별난 괴짜도 없다. 다 ‘사회생활 할 수 있을 듯한’ 사람들이다. 덕분에 씁쓸하리만치 썰렁한 유머가 튀어나와도 어쩐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리얼해!).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바깥에서 비현실적인 스펙터클을 구경하게 만드는 대신에 사건 속의 캐릭터들과 친구로 만들기. 로건 맥레이 시리즈는 에드 맥베인이 경찰소설에서 보여 준 최고의 미덕을 모범적으로 재현해 냈다.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갈 지 궁금해지는, 다음 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바로 그 매력 말이다.
에드 맥베인 짱 재밌던데! / 너무 잔혹한 스릴러는 싫어요
굉장한 트릭 없습니다 / 간지 함유량 적습니다

이벤트 기간 중 위 도서들을 구입하시면 1일 선착순 100명씩 한 권당 1천원 추가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