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짦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경이는 날마다 거리로 나갔다. 병원으로, 거리로, 도청으로, 시민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주먹밥을 가져다 날랐다. 금남로에 모인 사람들, 시청에 남은 사람들, 병원에 줄을 선 사람들... 5월의 광주에서 시민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주먹밥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광주 시민들이 ‘폭도’라는 말에 그토록 격분한 것은 바로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운 존엄한 인간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차원의 투쟁의 동기는 생명의 보호였다. 광주 시민들의 공동체는 삶과 죽음을 공동체 차원에서 정의했고 광주 시민들은 서로가 모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연약한 아녀자들을 지키고, 어린아이들을 지키고, 광주 땅과 그 땅의 모든 생명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 공포와 분노와 해방감에서 이루어졌다면 생명을 보호하고 고향을 지키는 투쟁은 냉철한 결의에서 일관되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종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하는 행위로 사건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문제는 당시 내가 목격했던 사건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그 역사를 내가 어떻게 전부 증언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십 년 전 내가 목격한 것은 마치 오늘 일인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