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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교신

출생:1901년, 함경남도 함흥

사망: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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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불멸의 문장들>

김교신

1901년 함남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와 어머니 양신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은 1903년 21세로 요절해 모친의 슬하에서 자랐다. 18세에 함흥농업학교를 마치고, 19세에 도일해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당시 일본의 저명한 영문학자 사이토 히사부로 밑에서 영어를 수학했다. 22세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중도에 박물 지리과로 전과해 27세에 졸업하고 귀국 후 함흥 영생여고와 서울 양정, 제일(경기), 개성, 송도 등에서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5년을 청년 교육에 종사했다. 그중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10년간이 가장 길었고, 1940년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재직 중에 불온 인물이라는 낙인으로 6개월 만에 추방되기도 했다.

1920년 4월에 길거리 전도를 받아 홀리니스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내의 심한 부패와 알력에 회의를 품고 같은 해 11월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서 강연에 참석했다. 1927년에는 김교신을 포함한 함석헌, 송두용, 양인성, 류석동, 정상훈 등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 동지 6명이 모여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1930년부터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의 주필이 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원고 작성, 잡지 편집, 배송, 총독부 검열 등 잡지의 제작과 발간, 우편 배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했다. 그래서 김교신과 ≪성서조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수필이나 산문이 모두 ≪성서조선≫에 실려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942년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발단이 되어 김교신을 비롯한 구독자들이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로 인해 김교신은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1943년 불기소 처분으로 출옥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김교신은 한동안 신앙을 전수한 형제들을 방문하며 신앙생활을 독려했다. 1944년 함흥 질소 비료 공장에 입사해 3000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와 교육, 의료, 주택 등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45년 공장 노동자의 병을 간호하던 중에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갑자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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