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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과학/공학/기술

이름:김진송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9년, 대한민국 서울 (사자자리)

직업:미술평론가 공예가

기타: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최근작
2021년 9월 <식물의 과학>

가부루의 신화

가부루국은 조족문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지금 가부루의 역사와 신화에 대해 실증적으로 규명할 자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글을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근거를 남기지 못한 역사는 사라져 버리고 신화로만 남을 것이다. 신화는 전설이 되고 다시 허구로 변해 버릴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노량진의 강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고 유년은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어느날 문득 기억의 강변에 서서 사라진 마을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펼쳐진 백사장, 철교와 뚝방, 서늘한 별장의 나무그늘, 강변의 기억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고, 그 기억을 닮은 현재의 일상은 점점 얄팍하게 부서져 간다. 사라진 마을에는 수산시장이 들어섰고 백사장은 도로로 변했고 샛강은 말라 버렸으며 모래섬에는 63빌딩이 들어섰다. 마을이 형태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나는 과거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최초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싶었다.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유년의 마을을 다시 찾기도 했지만 상실된 공간 속에서 기억을 오롯이 되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간의 상실은 기억의 상실과 맞닿아 있다. 나의 기억은 개발과 발전의 이름으로 폐허가 되었다. 미친 듯이 달려온 현대는 모든 기억의 공간을 파괴시켰다. 매일처럼 낡은 집이 무너지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 오래된 동네가 없어지고 새로운 도시가 들어선다. 우리 곁에서 과거는 매일같이 사라져 간다. 현재는 미래를 위해 기억의 저편으로 과거를 밀어 넣는다. 아무도 사라진 과거를, 잃어버린 기억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를 상실한 현재가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현재를 사는 우리는 누구나 기억망실증을 앓고 있다. 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기억의 공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과거의 공간을 파괴하는 끊임없는 행렬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늘 너무 많은 불만에 쌓이게 된다. 그가 분노를 표현하거나 이끌어내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그를 곁에 둔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무책임과 불합리가 너무 두드러져 보여서였을 것이다. 아니면 거칠 것 없는 그의 말과 행동에 나의 소시민적인 일상이 부끄럽게 드러났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이 사회에서 그가 머물러 있는 자리는 불안하다. 그는 20년을 줄곧 미술을 해왔지만 미술계에서 그의 자리는 없다. 그는 줄기차게 운동을 해왔지만 그 후광을 어깨에 두르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향하는 아니 그를 보는 사회를 향하는 나의 불만이기도 했다. 나는 80년대 미술운동이 있었다면 반드시 최병수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80년대 미술운동의 정신이 있었다면 그것을 지금까지 펄펄 살아 있는 시대정신으로 지니고 있는 화가가 최병수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인류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동주의 미술가이자 실천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 최병수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누구나 이야기를 꿈꾼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기발한 상상이 드러나는 이야기까지. 상상의 벌레들이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남긴 자국은 하나로 이어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허구의 나뭇잎을 쏠아대는 이야기꾼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지기를 꿈꾼다.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글을 쓰며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누구는 노래를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항상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상상과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면서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그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생각과 경험과 상상의 폭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될 때 벌어지는 생각과 상상의 틈은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나의 글과 너의 이미지가 만나면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시간에 빚지고 있다. 이야기의 구조란 시간의 흐름에 맞물려 있는 기계장치와 같은 것이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고 구조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실체가 없다. 이야기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 붙들어 맬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일 뿐인 이야기를 이미지로 만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나무를 깎고 쇠를 녹이고 물감을 발라 그려낸 모든 이야기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서사성이 이미지의 서사성으로 바뀐다 해도, 시간을 뒤죽박죽 흔들어놓아도 이야기는 다시 재빨리 물길을 트고 새로운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제 그게 이야기라는 것을 조금은 안다. 시간의 톱니바퀴를 굴려 상상의 공간에 잠시 머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장미와 씨날코

나는 과거를 야만의 시절로 바라보려고 했다. 역사 속에서 과거는 현재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과거는 현재의 주체들 앞에서 꼼짝없이 객체화되어 그들의 치모조차 가릴 수 없는 수치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과거는 그렇게 기억되며 역사는 그렇게 기록된다. 역사가는 과거를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현재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파견된 선교사들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의 과거를 현재의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나는 과거를 현재의 타자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과거를 통해 그것이 현재와 얼마나 다른지를 발견해내고 거기서 현재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은 나의 착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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