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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윤대녕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2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 (황소자리)

직업:소설가

기타:단국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데뷔작
1990년

최근작
2021년 12월 <소나기 그리고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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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걸어간다

그 오래된 새벽, 오련한 고요함이 찾아와 밖에 나가보니 웬 낭인 하나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는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불의 공기를 그는 마당 한가운데 가만히 내려놓고 나서 스스로 발자국을 지우며 대문 밖으로 사라져갔다. 마당은 태초의 적막 속에서 화염으로 부시게 타오르고 사방에서 새벽닭들이 깨어나 다투어 울었다. 문학은 내게 그렇게 왔다. 그 혹독한 자전의 엄습이 두려워 나는 줄곧 달아나려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담 밖에서 불꺼진 마당 안을 기웃거린다. 그렇듯 문학도 이제는 오히려 담담한 것이기를 바란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도자기 박물관』(2013년 9월) 이후 대략 5년여 만에 여덟번째 소설집을 낸다. 앞쪽에 실린 「서울-북미 간」과 「나이아가라」는 2015년 캐나다에서 머물던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경옥의 노래」는 2016년 귀국 직후에 쓴 것이므로, 세 편의 소설이 북미 체류와 연관돼 있다 하겠다. 2015년 1월에 나는 내심 ‘Out of Korea!’를 외치며 그야말로 뿌리치듯 한국을 떠났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나는 ‘작가인 나의 죽음’을 경험했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망명지인 북미에서 그러나 나는 더욱 사나운 꿈에 쫓겨 다녔다. 한국에서의 기억들이 매 순간 나를 압박하며 괴롭혀댔다. 낯선 도시의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우선 단 한 편의 소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맨 앞에 수록된 단편 「서울?북미 간」이 그것이다. 그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눈빛도, 얼굴도, 마음도. 내가 원하지 않거나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좀이 슬듯 뭔가 조금씩 계속 비틀리며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변화를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삶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하물며 내가 나를 다시 작가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경과가 필요했다. 당연한 얘기겠으나, 밤마다 거미줄을 치듯 한 줄 한 줄 글을 씀으로써 그것이 비로소 가능했다. 이제 겨우, 나는 되살아났다. 지난달에 귀천하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이 그리움을 가슴에 숯불처럼 끌어안고 또한 남은 생을 아득히 살아가야만 하리라. 책이 나오면 저 겨울에 계신 어머니부터 찾아뵐 생각이다.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든 열 권까지는 소설집을 내야지, 라고 다짐하고 있다. ‘객주문학관’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귀국 후 나는 청송에서 거듭 세 번의 여름을 나며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소설을 썼다. 객주의 그 푸짐한 밥상과 술에 대해 얘기할 때면, 내 어머니는 무척이나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기뻐하셨다. 2019년 1월 초순

대설주의보

단편 「대설주의보」는 2008년 겨울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쓴 것이다. 내 생에서 모종의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과연 그 심정을 담았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이 소설은 최승호 선생의 오래전 시집 『대설주의보』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책을 내기 전 선생께 전화를 걸어 새 소설집의 제목을 『대설주의보』로 하고 싶다고 하자, 선생은 뭐 괜찮지 않을까? 라며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보리」와 「여행, 여름」은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썼다. 그곳에 머물게 되면 나는 여지없이 비감해지곤 하는데, 아마 박경리 선생 때문이 아닐까? 「보리」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여름에, 「여행, 여름」은 작년 여름에 씌어졌음을 밝혀두고 싶다. 「오대산 하늘 구경」과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는 재작년 여름 ‘월정사’에서 두 달 간 여름 방부를 들였을 때, 「도비도에서 생긴 일」은 작년 겨울 속초에 있는 ‘척산온천’에서 썼음도 훗날까지 스스로 기억해두고 싶다. 나머지 한편「풀밭 위의 점심」만이 일산 ‘작업실’에서 쓰인 것이다. 연전에 나는 문인 집단거주지역인 일산을 떠나 서울 북한산 아래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더불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위에서 일일이 밝혔듯 감사를 드릴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소설은 다만 혼자 쓰는 게 아니라는 자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렇다면 칼날을 입에 문 사내처럼 좀더 일념의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나는 등단 이십 년이 되었고 여섯 번째 소설집을 내고 있다. 그런데도 늘 앞이 막막한 것은 삶 자체가 막막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래 만나온 사람들의 존재가 더더욱 소중하고 그리워진다. 만나서 헤어지는 순간부터 다시 그리워진다. 그럼 뒤를 돌아보게 돼 있다(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 그들도 나를 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심정으로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 순간마다 부젓가락으로 가슴을 후비듯 목울대로 뜨겁게 차오른 생각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내 책을 읽어준 독자들께도 새삼스레 인사 전하고 싶다. 부디 오래오래 소중히 생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음. 총총.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때그때 애틋한 감정들이 투사된 작품들을 모은 거라서 감회가 복잡합니다. 돌아보니 문학적인 나이를 먹기 위해 애를 쓴 흔적들이 보이는군요.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월간 『현대문학』에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연재를 시작할 무렵 나는 쉰 살의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때때로 지나온 생生을 돌아보게 되는 나이로 접어든 것이었다. 모든 존재는 시공간時空間의 그물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이 씨줄과 날줄로 겹치는 지점에서 매 순간 삶이 발생하고 또한 연속된다. 이렇듯 시간의 지속에 의해 우리는 삶의 나이를 먹어간다. 한편 공간은 ‘무엇이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과거에 내가(우리가) 존재했던 공간은 세월과 함께 덧없이(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지나고 나면 삶은 한갓 꿈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정말이지 모든 게 찰나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그 꿈이라도 한사코 복원하고 싶었던가 보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가끔 찾아가보았다. 짐작했듯 대부분의 공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그곳에는 마음의 텅 빈 장소場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달 한 편씩 연재를 하면서 나는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복원하는 글쓰기가 많은 순간 내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복원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삶이 내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군데군데 문장을 바로잡으며 원고를 정리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래저래 경황이 없던 탓이었으나, 지금이라도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또한 앞으로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더러 공감을 해준다면 이제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다.

어머니의 수저

한갓 음식으로써 어머니를 다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음식을 얘기함으로써 우리는 언제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또 어느 곳에서든 그 이름을 불러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어머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동안 어머니 대신 나를 연명케 했던 음식에 대해 한 번은 얘기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 외의 음식은 내게 늘 군림을 강요했고, 나는 그것들과 갈등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성인됨이었고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슬슬 입맛이 변하고 마침내 세상과 타협을 했을 땐 어느덧 내가 부모가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즈음에 늙은 어머니가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머니, 이제 내가 여기 한 밥상 차렸으니 함께 드셔봅시다. 그리고 우리 그때 헤어진 뒤로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오랜만에 터놓고 얘기도 좀 나눠봅시다. 나는 이렇듯 매양 속절없이 살아왔답니다, 어머니.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

사람이란 무릇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추억의 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저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앞으로 남은 반은 그 열량에 있어 이미 완성된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무수한 자전을 통해 스스로 삶을 완성해가야 할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만나왔던 이들-이를테면 삶의 동창생들-도 사정이 비슷하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아주 특별한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그 옆 사람에게도.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십삼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독자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첫 장편소설만 아니었다면 절판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운명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왕 복간본을 내놨으니 독자들이 조금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책을 처음 내던 1995년 당시를 돌아보니, 돌연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온다. 그때 나는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삐걱이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듯 매순간 아슬아슬하게 글쓰기를 지속해온 게 정녕 사실이다. 부디 여한이 남지 않도록, 보다 온 힘을 다해 내가 살아온 방식과 운명을 고수하고 싶다. 다른 도리가 없음을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개정판 작가의 말' 중에서)

제비를 기르다

그리고 삼년 만에 다시 소설집을 낸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던 지난해에 여러 편의 중단편을 쓸 수 있었다. 자정에 작업실에서 퇴근할 때면 막사발에 냉수를 받아놓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것을 마셨다. 하루하루 그 일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과연 삶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나를 산짐승처럼 틈틈이 살폈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천지간

문학을 과정의 예술로 해석하는 저는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문학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흥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빈 데가 너무 많으니 채워 넣을 데도 그만큼 많다는 사실이 바로 제 글쓰기의 괴로운 행복 같습니다.

코카콜라 애인

정말이지 꿈을 꾸었나 싶게 세월이 흘러갔다. 다시 꾸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기억은 남겨둬야 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 여름내 이 소설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하나 깨달은 것은 나를 포함한 사람 모두가 각자 연민의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크게 얻었다. 이제 겨우 떠나보낼 수 있게 됐다. 부디 생을 거듭해야 한다.

피에로들의 집

수년 전부터 나는 도시 난민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비롯해 삶의 기반을 상실한 채 실제적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유대가 붕괴되면서 심각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훼손된 존재들을 통해 새로운 유사 가족의 형태와 그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싶었다. 이는 삶의 생태 복원이라는 나의 문학적 지향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나는 내가 청년으로 살았던 80년대와 90년대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영영 그럴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두려움 때문에.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기억과 상실, 열망과 좌절, 기적과 사랑, 고독과 죽음... 이 모든 것이 지금껏 내가 애써 외면해 왔던 과거의 뼈아픈 기억들이었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나는 내가 청년으로 살았던 80년대와 90년대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영영 그럴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두려움 때문에.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기억과 상실, 열망과 좌절, 기적과 사랑, 고독과 죽음... 이 모든 것이 지금껏 내가 애써 외면해 왔던 과거의 뼈아픈 기억들이었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초판본 ‘작가의 말’에 못다 한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가 ‘자발적 유배’라고 표현한 제주에서의 체류 기간은 2003년 봄부터 2005년 봄까지였는데, 서울로 올라온 직후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이 차디찬 골방에서 혼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그분과의 인연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사진 작품으로 책 표지를 만들게 되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비록 세상에 없다 할지라도 김영갑 선생께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사고무친의 섬에서 당시 나와 함께해주었던 현지 어부들과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늘 술을 함께 마셔주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 천자성 선생께도 새삼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은 나의 쓸쓸한 유배생활을 도와주었으며 ‘지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 얼마 전에 다녀왔음에도 제주가 다시금 눈앞에 그립다. 여름, 겨울의 폭풍우가 특히나 그립다. 제주에서 올라온 후 내 가슴에서 ‘거칠음’이 사라진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 거친 힘을 회복하고 싶다. 언제든 내 안의 호랑이와 대적할 수 있는 그 힘 말이다. 2010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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