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배우고,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아름다운 우리말과 뜻이 담긴 동시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체득할 수 할 수 있게,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 엮었다. 어린이를 사랑한 아홉 명의 시인들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닿아 아이들이 맑고 건강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차례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 구성했다. 동식물, 계절, 가족, 그리고 친구와 이웃, 공동체로 나눈 것이다. 또한 학교공부에도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시들을 수록했다.
최근작 :<연필 들고 동시 따라 쓰기> ,<동물 놀이 동요> ,<밤 한 톨이 땍때굴> … 총 65종 (모두보기) 소개 :1915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률(龍律)이다. 고원공립보통학교와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 고향 미둔리에서 결혼했으며, 1945년부터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고원중학교, 청진여자고급중학교, 청진제일고급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1933년 동요 <울엄마젓>이 ≪어린이≫ 5월호에 입선되고, <까치야>가 ≪아이생활≫ 5월호에 윤석중의 고선으로 뽑혀 발표되고부터 정식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6년 ≪童話(동화)≫에 동요 <제비>, <?리아>, 동시 <국화와 채송화> 등을, 1937년 ≪소년≫ 창간호에 대표작 <닭>을 발표했으며, 1937년부터는 동요·동시와 함께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강소천은 고향에서 6·25를 당하고, 1951년 1·4후퇴 때 고향에 부모와 처자를 남겨 둔 채, 흥남에서 군부대를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때 그는 남한 땅을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는 일시적으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시적 삶의 공간으로 생각했으나 6·25 전쟁은 남북을 갈라놓은 휴전으로 종결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결국 남한 땅은 그에게 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일구어 내야 하는 공허한 삶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월남 후 그는 주로 아동잡지 편집과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1963년 타계할 때까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 ≪새벗≫ 주간, ≪아동문학≫ 편집위원,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분과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문인협회 이사, 한국보육대학 강사,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강사, 국정교과서 국어과 심의 의원, 서울 중앙방송국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동요시집 ≪호박꽃초롱≫(박문서관, 1941), 동화집과 소년소설집으로 ≪조그만 사진첩≫(다이제스트사, 1952), ≪꽃신≫(한국교육문화협회, 1953), ≪진달래와 철쭉≫(다이제스트사, 1953), ≪꿈을 찍는 사진관≫(홍익사, 1954), ≪달 돋는 나라≫(대한기독교서회, 1955), ≪바다여 말해다오≫(대한기독교서회, 1955), ≪종소리≫(대한기독교서회, 1956), ≪무지개≫(대한기독교서회, 1957), ≪인형의 꿈≫(새글집, 1958), ≪꾸러기와 몽당연필≫(새글집, 1959), ≪대답 없는 메아리≫(대한기독교서회, 1960), ≪강소천 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1), ≪한국아동문학전집?강소천편≫(민중서관, 1962), ≪어머니의 초상화≫(배영사, 1963), ≪강소천 아동문학전집≫ 전 6권(배영사, 1964), ≪강소천문학전집≫ 전 15권(문음사, 1981), ≪강소천 아동문학전집≫(교학사, 2006) 등이 있다.
최근작 :<김소월 시집 컬러 일러스트> ,<김소월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총 332종 (모두보기) 소개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최근작 :<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세트 - 전4권>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와 이바라기 노리코 세트 - 전2권>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총 468종 (모두보기) 소개 :1917년 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8~1930년(12세~14세)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1931년(15세) 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20세)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 12월호에 「빗자루」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했다. 1941년(25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3년(27세)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었다. 1944년(28세)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45년(29세)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최근작 :<연필 들고 동시 따라 쓰기>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세상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며 어린이 논술 교재를 만드는 출판편집인이다. 어린이들이 우리 위 세대들도 즐겼던 아름다운 동시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눈, 예리한 눈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엮었다.
최근작 :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그림 그리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한국 화가이다. 어린 시절 글을 쓰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책과 신문에 잔뜩 둘러싸여 살았다. 많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상상하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서 실험적인 작업 을 많이 한다. 그림책, 회화, 일러스트, 캘리그라피, 벽화 등 그 어떤 작품이라도 첫사랑에 빠지듯 그려낸다. 아름답고 따뜻한 예술가로 살고자 소망하며,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알려 주는 일을 하며 인생을 그려 가고자 한다. 『연필 들고 동시 따라 쓰기』『우리가 알고도 모르는 동물들』『구부러진 길』 등에 그림을 그렸다.
연필을 들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동시를 듣고 쓰다 보면,
어느새 시인의 감성이 쑥쑥,
글솜씨도 쭉쭉,
세상을 보는 눈도 밝아진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곱디고운 우리 동시, 64편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입으로 부르고 손으로 따라 쓰며 마음에 꼭꼭 담자
아이가 어릴 때 무엇을 읽느냐는 성장의 동력이 된다. 읽기 교육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이다.『연필 들고 동시 쓰기』는 한글을 배우고,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아름다운 우리말과 뜻이 담긴 동시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체득할 수 할 수 있게,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 엮었다. 어린이를 사랑한 아홉 명의 시인들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닿아 아이들이 맑고 건강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차례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 구성했다. 동식물, 계절, 가족, 그리고 친구와 이웃, 공동체로 나눈 것이다. 또한 학교공부에도... 연필을 들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동시를 듣고 쓰다 보면,
어느새 시인의 감성이 쑥쑥,
글솜씨도 쭉쭉,
세상을 보는 눈도 밝아진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곱디고운 우리 동시, 64편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입으로 부르고 손으로 따라 쓰며 마음에 꼭꼭 담자
아이가 어릴 때 무엇을 읽느냐는 성장의 동력이 된다. 읽기 교육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이다.『연필 들고 동시 쓰기』는 한글을 배우고,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아름다운 우리말과 뜻이 담긴 동시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체득할 수 할 수 있게,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 엮었다. 어린이를 사랑한 아홉 명의 시인들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닿아 아이들이 맑고 건강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차례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 구성했다. 동식물, 계절, 가족, 그리고 친구와 이웃, 공동체로 나눈 것이다. 또한 학교공부에도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시들을 수록했다.
보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고 쓰는 훈련을 통해, 한글 익힘과 마음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유튜브에서『연필 들고 동시 쓰기』를 검색하면 오디오북을 들으며 따라 읽고, 쓸 수 있다. 꼭 쓰기 활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수시로 들으면서 아름다운 동시를 익히다 보면 큰 세상을 품으며 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