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희음의 첫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는 한 여성 주체가 어떻게 자기만의 인식과 목소리를 얻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통과제의와도 같은 시집이다. 부재와 고독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기다린다는 것, 그 “길고 지루하고 무르고 질”(「목젖의 시절」)긴 시간을 희음은 “목소리도 신음도 없이” 잘 견뎌내었다. 앙상한 슬픔과 건조한 어둠을 건너 시인은 마침내 “깨어난 작은 자”(「여름 벽」)로서 벽을 향해 “빌어먹을”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그 속삭임이 점점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라나고 “터져 나온 것이 울음이 아니라 물음일 때”, ‘이름’은 비로소 태어난다. ‘않다’와 ‘아니다’에 기대어서만 간신히 설명할 수 있었던 세계는 이제 얼굴 없던 ‘타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나’의 통증과 치욕의 원천 역시 한결 명료해진다.
말과 침과 오줌. 이 세 가지는 시인이 세상을 더럽히는 동시에 정화하는 자기 방출의 질료이며, 타자와의 소통과 사랑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행해져 온 무례와 폭력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기도 하다. 시인은 더 이상 쐐기풀로 오빠들의 조끼를 뜨며 침묵하는 누이가 아니다. 밤새 파도 속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는 사이렌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는 세헤라자데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우리’가 되고,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에 이르러 “치마들은 마주 본다/들추지 않고 입속 깊이까지 줄 서 있는/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그 마주 봄은 “우리는 우리로 울렁거리고/우리는 우리로 더 깊이 희다”(「사양」)고 말하는 시인을 “다시 태어나는 말들의 붉은 입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세계와의 키스는 그렇게 느리지만 확실하게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