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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롯데월드타워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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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출간된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은 나치 집권 직후인 1933년 5월 10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책 화형식’에서 불 속에 던져졌고 작가 에른스트 하프너는 1938년 나치 선전성 산하의 ‘제국문학분과위원회’에 소환된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80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 소설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 것은 부분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노숙 청소년에 대한 삶을 미화하지 않고 진실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읽는 것은 과거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현시대 청소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첫문장
'의형제' 패거리에 속하는 여덟 명의 청소년이 공장의 긴 마당을 지나고 건물의 이층까지 길게 늘어선 피곤에 지친 인간 행렬의 아주 작은 고리를 이룬 채 서서 기다린다.

슈피겔 (독일)
: 격렬하고,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독일 대표 일간지)
: 베를린의 잃어버린 젊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독자를 자유롭게 언더그라운드의 대도시 미로 속으로 이끌어 간다.
베를리너 차이퉁
: 에른스트 하프너 -- 베를린의 수수께끼

최근작 :<[큰글씨책]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베를린 거리의 아이들>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최근작 : … 총 17종 (모두보기)
소개 :

역자후기
1929년 10월 24일과 10월 29일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함으로써 국제 금융시장이 붕괴되었고, 미국 경제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제 금융시장의 붕괴는 즉각적으로 전(全) 세계로 파급되어 나가면서 실물 경제에도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 경제는 곤두박질을 거듭했다. 그 결과 미국 자본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던 유럽, 특히 독일 경제는 붕괴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 독일의 실업률은 1933년까지 30%를 넘어서게 되었는데, 1928년 연평균 140만 명이었던 실업자 수는 1932년에 560만 명까지 치솟았다. 실업자의 증가는 단순한 경제 지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사회 각 계층의 급진화·과격화를 미리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경제 위기로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부터 형성되었던 좌·우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고, 중도적인 정치 세력은 급속하게 기반을 잃게 되었다. 경제 위기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사회계층 중에서 중소 상인, 수공업자, 사무직 고용자와 농민은 나치당으로 대변되는 극우 세력에 흡수되었고, 노동자 계층은 공산당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제2당의 지위로 올라선 나치당은 마침내 1932년 9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선거를 통한 합법적 독재’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쟁의 고통, 전후의 혼란, 경제와 사회 기반의 붕괴 그리고 극단적인 정치적 갈등 때문에 대부분의 계층이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제일 큰 피해를 본 세대는 192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일 것이다. 전쟁 중에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청소년 세대는 전쟁으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세대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거나 설령 살아남았어도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후방에 남아있던 어머니들은 군수공장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고된 일을 함으로써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만 했던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기에도 힘이 부쳤으며, 아이들을 돌볼 시간적 여유를 찾을 수도 없었다.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아이들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거친 세상에서 힘들게 삶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무리를 이루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의 냉혹함을 몸으로 체험했고,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인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렇게 과거를 잃어버리고, 미래를 상실한 채 1920년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길거리에서 살았던 청소년 세대의 진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대도시 베를린의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청소년 세대의 모습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고 적나라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들 청소년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거운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들이 범죄자이고 가해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닌 전쟁으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호와 사랑을 제공해주는 가족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고, 타인의 관심과 호의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방치된 채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 기본적 욕구를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또한 그들은 교육 기관의 억압적 방식에 무방비 상태로 넘겨졌다. 교육기관은 이들을 보호하고 계도한다는 미명 아래 청소년들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의 진짜 고민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실질적인 도움이나 인간적 관심 대신에 교육생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태도를 꺾고 복종을 잘하는 객체로 훈육시키려고만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청소년을 담당했던 교육기관들은 권위적인 방식으로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을 학생들에게 가했다.
체계적으로 가해진 억압적인 교육기관의 폭력을 벗어나는 것에 성공한 아이들은 대도시로 몰려갔는데, 그곳에서의 삶의 조건이 좀 더 견딜만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미숙련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몸을 팔아서 구차한 삶을 이어나가곤 했다. 심지어 일부의 청소년들은 보호와 인간적 따스함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리를 이루기도 했다. 같은 또래로 이루어진 이런 패거리는 각각의 구성원에게는 한 번도 체험해본 적이 없었던 가족을 대체하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건물이나 공터에 모여서 술을 마시거나 지탄을 받을 만한 짓을 저지름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몇 시간이나마 자신들이 겪는 비참함을 잊어보려고 했다.
베를린 밑바닥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묘사하고 있는 이 소설은 엽기적이거나 이색적인 소재를 아무런 연관 관계없이 단순하게 나열하는 통속적인 르포르타주 소설도 아니고, 도덕적 우월감에서 사회적 참상을 고발하는 사회 비판적 고발문학도 아니다. 오히려 잘 짜인 구성을 지닌 이 소설은 우울하지만 정확한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동시에 이 소설은 비참한 사회 상황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서술 방식에서도 높은 문학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막 시도되었던 몽타주나 내적 독백과 같은 문학적 기법들을 전통적인 서술 방식과 적절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당시의 전위 문학들이 쉽게 빠졌던 난해하고 현학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당시의 문학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소재를 수준 높은 문학적 기법으로 녹여내서 만들어낸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 가까이 잊혔다가 이제 다시 재발견된 이 소설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 것은 부분적으로 이 소설이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노숙 청소년에 대한 삶을 미화하지 않고 진실 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된 이유는 화자(話者)가 작중의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보여주는 관심과 공감이 깃들인 태도와 이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오늘의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당시의 고발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지나치게 열정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장되고 비난하는 어조를 취하지도 않고, 특정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재단하고 비난하는 도덕 설교가의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화자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묘사하는 대상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화자의 중립적이고 절제된 객관적 묘사가 오히려 암울한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아주 암울한 모습이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의형제’ 패거리들은 베를린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천의 노숙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범죄와 빈곤의 영원한 순환에 휩쓸려 목표도 없이 쓸려가고 있지만, 그들 중 몇몇은 미래도 전망도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루트비히와 빌리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무모한 시도를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긴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지만 자유로운 외부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시차를 두고서 교화소를 도망친 루트비히와 빌리는 우연히 베를린 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점점 직업적 범죄자 집단으로 발전해가는 패거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패거리에 남아있으면 누리게 될 수도 있는 금전적 이득과 안락한 삶 그리고 심리적 안정감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무리에서 벗어난다. 이제 그들은 고되지만 정직한 삶, 스스로 결정한 삶을 시작하기로 굳게 결심한다. 하지만 이들이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삶이 뿌리를 내리려는 순간 어두웠던 과거가 다시금 이들의 삶에 끼어들어 방해를 한다. 복수를 하려는 익명의 제보자가 두 사람을 고발하고, 그들은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삶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하지만 체포되어 교화소로 압송이 되는 순간에도 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변덕스러운 삶이 그들에게 요구한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현실의 난관에 직면해서도 꺾이지 않는 이런 의지가 바로 암울한 모습으로 가득 찬 이 소설에서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빛을 발휘하는 유일한 희망의 빛이다. 그리고 소설의 저자도 미래에 대한 어떤 낙관적 전망도 제시하지 않으며, 두 사람의 결심을 그저 담담하게 전해주는 것으로 소설을 끝마친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직 독자의 상상 속에서 맡겨진다. 이 소설의 독자들 역시 그 희망의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현재의 독자가 이 책에서 읽는 것은 과거의 모습만은 아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현재 청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0%를 넘는 유럽의 청년 실업률과 10%를 넘어선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암울해지고, 삶을 위협하는 사회적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간접적 지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었던 상황과 지금의 독자들이 겪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의 청소년과 지금의 청소년들이 희망찬 미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이 사회로부터 관심을 받고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을까?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런 여러 질문에 긍정적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프너의 소설은 도처에서 감지되고 가슴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보편적 두려움에 굴복해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지 말고, 미약하기는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도록 호소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암담한 상황과 현실적인 갖가지 어려움 속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아닐까?
1932년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브루노 카시러Bruno Cassirer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소설을 쓴 에른스트 하프너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가 1925-1933년 사이에 베를린에서 기자 겸 사회복지사로 일을 했다는 사실, 그가 발표한 유일한 소설이 나치가 집권을 한 1933년 직후인 5월 10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책 화형식’에서 불 속에 던져졌다는 사실, 1938년 나치 선전성(省) 산하의 ‘제국문학분과위원회’에 소환된 직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그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거의 전부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의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문학을 주제로 삼은 연구가 현재까지 아주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제야 비로소 그의 책이 다시 독자들의 손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놀랍다. 어쨌든 하프너의 유일한 소설이 긴 망각의 세월을 이겨내고 다시 발견되어, 여전히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각자가 내놓는 모든 대답이 다 정답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사라지지만 작품은 남는다고들 한다. 남겨진 작품이 떠나간 작가를 기억하도록 만드는 책. 바로 그런 책이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80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가를 기억 속에 떠올리도록 하는 이 책을 감히 좋은 책이라고 말하겠다. 그 이유는 이런 책이야말로 불멸을 꿈꾸는 작가의 은밀한 욕망을 훌륭하게 충족시켜준 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