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만화가) : 우리의 삶 그 아래로, 보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물밑으로 흐르고 있는 또 하나의 삶이 있다. 그 삶을 대면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는 진실이 있다. 그 불편한 진실들을 얘기해 주는 잊지 못할 이름들. 김성희, 김수박, 마영신, 한수자, 김홍모, 권용득. 아리고 눈물나고 화나고 꺼림칙한, 그러나 꼭 한 번은 봐야 하는 그들의 만화. 이 만화들이 있기에 우리 나라에 만화 문화가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 만화는 예술일까? 20세기 초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라는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호명했지만, 1960년대가 될 때까지도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란 인식이 강했다. 소설이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지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예술장르로 본격화했다면 만화가 명실상부한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960년대 베트남전쟁과 68혁명의 결과였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표현대로 “서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수백만 보통 사람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출현한 새로운 시민들에게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친근한 새로운 예술양식으로 대두된 것이 현대 성인만화의 재발견이었다.
우리에게 만화는 아직 예술로서의 시민권을 획득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른바 ‘압축근대화’를 경험하면서 1970년대를 ‘소설의 시대’, 1980년대를 ‘시의 시대’였다고 말하지만, ‘만화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만화는 출판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가장 만만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만화의 시대가 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수백만 보통 사람들이 아직 대한민국의 상식이 되지 못하고, 주류로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오가는데, 나는 김성희, 김수박, 마영신, 한수자, 김홍모, 권용득 이상 6명의 작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작품집 《빨간약》을 읽으며 결국 예술은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소외된 이들을 통해 예술성과 생산성이 유지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만화는 가장 대중적이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예술 장르다.
보이지 않는 감시와 검열의 그림자가 우리 내면의 용기를 갉아먹는 시대다. 이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 가는 상황에서 우리라도 모여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뭉쳤다. 용기를 잃어 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구나’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나섰다. 이런 시대, 한국의 젊은 만화가들이 건네는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빨간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택이다. 나는 이 작품집을 우리 아이에게 꼭 읽게 하고 싶다. 서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수백만 보통 사람의 역사 속에 살아가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