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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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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행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을 담아낸 구도 일기이다. 오랜 사유의 시간들이 응축되어 꿈틀거리는 선(禪)의 예지와 직관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의 저자는 정휴 스님이다. 스님의 자기 관조와 성찰, 생사를 초월하여 수행자의 삶을 완성한 선사들의 정신세계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깨달음의 멋
종언지(終焉地)를 찾아서/ 걸어서 오는 봄/ 꽃잎은 흩날리고/ 입적을 준비하면서/ 구름과 같이 오더니 달 따라 가버리네/ 한 손에는 죽이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살리는 봉(棒)을 든 선사/ 앉아서 가고 서서가는 자유/ 걸어가면서 입적하는 아름다운 열반/ 삶이 성숙하려면 안으로 여물시간이 있어야/ 고통이 있을 때 안으로 눈이 열린다/ 영혼이 맑아 질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운 선지식 경봉선사/ 미소 속에 감추어진 천둥소리 같은 할(喝)/ 삼소굴(三笑窟)의 불노옹(不老翁)/ 보검으로 송장을 베지 않는다/ 우치재(愚痴齊)/ 곳곳에서 그대를 만난다/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지 말라

깨달음의 맛
번뇌가 여물어서 사랑이 되네/ 부처보다 사람 되기가 어렵네/ 마음을 찾는 일보다 마음을 쓰는 일이 어렵다/ 비워야 눈이 열리고 밝은 귀가 트인다/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찾으려 하는가/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스님은 고불(古佛)입니다. 자네는 새로운 부처이군./ 진리에 얽매이면 자유스럽지 못한다/ 내려놓음의 미학/ 권력자를 접대하는 방법/ 무소유의 가풍/ 안과 밖에서 구하는 것이 없다/ 부처란 말을 듣기 싫어 한다/ 바른말은 쇠망치/ 삶을 배우듯이 죽음을 미리 배워야/ 기다림으로 이룬 대기만성/ 베풂의 가치를 깨닫게 한 눈 밝은 선지식/ 제 몸에서 아름다움을 풀어내는 계절/ 얽매임이 없는 자유/ 영혼을 때리는 울림

부처님 꽃을 드시다
낙엽은 화두(話頭)이다/ 그리운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 죽음은 천둥처럼 찾아오고 머리 위에 우레처럼 떨어진다/ 누구나 빈손으로 가야 한다/ 얼마나 좋으십니까

시심마 일기
백담사 문무관 시심마 일기(日記)/ 바위처럼 앉아서 천년을 한 생각 속에 이루게 하라/ 부처와 조사의 틀 속에 갇히지 말라/ 그대가 부처인 걸/ 살아있는 믿음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끝없는 물음을 통해 자아를 일깨워야/ 무문관을 떠나면서/ 내 안에 갇히지 말고 기존의 가치를 버려라/ 내가 거기 부처가 있음을 보지 못했다

무산오현 (백담사 무문관 조실)
: 그는 몸과 마음에서 無碍의 자유를 풀어내는 雲水이다.
衲僧과는 평생 把手共行한 寒山 같은 도우이다.
일찍이 禪敎를 全歸掌握한 宗門의 聖骨이나 기꺼이 범추를 박대하지 않으니 그 法衣는 강호를 덮고 남았다.
陋巷에 머물 때는 승단이 불조혜명의 구심처가 되도록 온몸을 던지고 蘭若에 들어서는 생사의 關頭에서 任運自在를 보여준 法主가 바로 禪師다. 거년에는 설악산 無門關에서 保任하더니 門 없는 門을 부수고 나와서는 드디어 천하에 한 물건을 내놓았다. 그 末後句는 一隻眼을 얻은 작가 宗師라 할지라도 혀를 빼물게 하는 것이니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납승은 더 이상 보아야 할 눈도 말해야 할 입도 없다. 왜 그런지는 책을 펴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종하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이 치열하고 표현하는 一言一句가 古劍처럼 빛났다.

최근작 :<마음을 울리는 부처님 말씀 300>,<백담사 무문관 일기>,<해탈(解脫)로 가는 길> … 총 30종 (모두보기)
소개 :

정휴 (지은이)의 말
저자 서문

삶은 살수록 깊어지고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없는 화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고통과 좌절만이 반복되고 즐거움은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유하고 채우는 데만 집착하여 허둥댄 날이 많았고 삶 속에 죽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육십이 넘어 사유가 깊어지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채우고 싶어 하는 곳을 비워야 소중한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인간에게 이익을 주고 숭고한 정신은 고통 속에 다듬어지고 깨달음은 번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정진이 길어지고 응시가 깊어지자 안으로 눈이 열리고 귀가 밝아지자, 내 안에 닦아도 사라지지 않은 어둠이 있고 언젠가 밖으로 뛰쳐나올 소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정진을 통해 눈이 열리고 응시가 깊어지면서부터입니다.
설악산에 머물고부터는 삶과 죽음을 통찰하고 깨닫는다고 정신이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묻고 묻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듭니다.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벼락처럼 눈앞에서 이루어질는지 뒤에서 덮칠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치르면서 죽음을 깨닫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품위 있고 존엄스러우면서 초탈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수명을 늘리기 위해 임종 직전까지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사람이 많습니다.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되면 내가 벗어버린 빈껍데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에 집착하여 자기를 잃다 보면 생사의 굴레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없습니다. 육신을 헌 누더기 한 벌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해야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아름답고 초탈적 죽음은 앉아서 죽거나 서서 입적하고 걸어가면서 이룬 열반을 보행열반이라고 합니다.
‘승가난제’는 보리수 나뭇가지를 잡고 명상하듯 입적하였고 ‘관계지한’ 선사는 걸어가다가 문득 서 있는 자세로 열반하였습니다.
삶과 죽음을 완성하지 않고는 몸과 마음에서 초탈적 자유를 풀어낼 수 없습니다.
자기 죽음을 입체적 모습으로 자유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완성되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영혼이 맑아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허둥대고 서둘다 보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됩니다.
삶은 한꺼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삶이 제대로 성숙하려면 걸맞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안으로 여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육신이 삭아서 무생(無生)의 삶을 풀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