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악몽이 현실에서 되살아나고, 두 여인의 해묵은 상처가 고개를 든다. 모티프는 두 가지다. '여성'과 '완벽한 몸을 향한 숭배와 욕망'. 2007년 역량 있는 스페인어권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플라네타―카사 데 아메리카 상'의 제1회 수상작.
40대 초반의 베로니카는 유력 일간지의 국제부 부장이다. 평범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매력적인 애인까지 두고 활기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이웃나라 콜롬비아에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엄청나게 비대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바로 중.고등학교 동창인 레베카이다.
학창 시절, 뚱뚱한 외모 때문에 급우들에게 끝없이 멸시 당하고 조롱의 대상이었던 레베카. 하지만 베로니카에게는 그녀와 남다른 추억이 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고전음악을 좋아했던 레베카와 비밀스런 친구관계를 유지했던 것. 그러나 베로니카는 놀림거리였던 레베카와의 관계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25년 만의 급작스러운 레베카의 출현으로 베로니카의 일상은 균형을 잃는다.
작가는 완벽한 몸을 향한 현대인들의 욕망에서 정반대에 놓인 레베카라는 한 인물이 가치관이 왜곡된 사회의 횡포에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그려낸다.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더불어, 인물을 해부하듯 밀도 있고 치밀한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최근작 : … 총 40종 (모두보기) 소개 :에스파냐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책의 출판 기획과 번역 일을 한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으로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감상적 킬러의 고백》, 《귀향》,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뻬드로 빠라모》, 《바다의 성당》, 《빅투스》 등 다수의 텍스트를 우리 글로 옮겼다.
리얼리스트의 예리한 레이더, 여성의 내면을 탐지하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은 유럽 최대의 출판사 중 하나인 ‘플라네타’와 스페인 정부의 문화재단인 ‘카사 데 아마레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제1회 플라네타―카사 데 아메리카 상(2007)’을 수상했다.(‘플라네타―카사 데 아메리카 상’은 스페인어권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 중 역량 있는 소설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400여 명의 소설가들이 응모하여 치열한 경합 끝에 알론소 꾸에또가 수상했다)
꾸에또의 전작들은 사회성이 짙은 소설들이다. 주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이나 남미의 이데올로기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룬다. 신작 『고래여인의 속삭임』은 확실히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 작가는 시선을 안으로, 특히 여인의 내부로 돌리면서 내밀하고 정교하게 현상과 내면, 경험과 인식 그리고 상처와 치유를 이야기한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에도 묵직한 주제가 숨어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진실과 용기의 문제다. 1인칭 화자 베로니카가 자신을 끊임없이 ‘엉터리’라고 칭하며 자책하는 이유를 파헤치다 보면 드러난다. 이 소설은 발표된 즉시 라틴아메리카 문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회성 짙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점과 『고래여인의 속삭임』이 보여주는 작품의 이중구조, 즉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에 함의된 의미를 찾아 내면을 탐험하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 때문이다.
이 소설은 두 여인의 해묵은 상처와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과거의 악몽이 현실에서 되살아나고 이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심리공포소설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감정을 왜곡하거나 포장하는 대신 작가는 히치콕의 메커니즘처럼 일상에서 드러나는 공포를 촘촘하게 그려낸다. 등장인물을 해부하듯 밀도 있고 치밀하게 그려낸 심리묘사와 탁월한 필체,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독자가 감상에 젖는 대신 자기 인식에 비수를 들이대게 만든다.
25년 만에 나타난 비밀친구의 은밀한 속삭임
40대 초반의 베로니카는 유력 일간지의 국제부 부장이다. 평범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매력적인 애인까지 두고 활기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이웃나라 콜롬비아에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엄청나게 비대한 여자를 만난다. 바로 중?고등학교 동창인 레베카이다. 학창 시절, 뚱뚱한 외모 때문에 급우들에게 끝없이 멸시 당하고 조롱의 대상이었던 레베카. 하지만 베로니카에게는 그녀와 남다른 추억이 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고전음악을 좋아했던 레베카와 비밀스런 친구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베로니카는 놀림거리였던 레베카와의 관계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베로니카는 25년 만에야 이루어지는 레베카의 만남을 극도로 꺼린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을 자는 눈치도 아니었다. 눈을 허옇게 뜬 채 사지가 경직된 사람 같았다. 나는 잠을 청했다. 그녀가 나를 못 알아보기를 기대했다. 하느님, 제발 절 알아보지 못하게 해주시길…….
(……)
“모르겠어?” 그녀가 물었다. “날 못 알아보겠어?”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
“네” 내가 물었다.
“날 모르겠어? 모르겠냐고? 나, 레베카야. 기억 안 나? 내가 기억 안 나?”
그제야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꺼운 살갗 위로 갑자기 마술이 일어난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잊어버린 과거의 저주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우면서 차가웠다._18~20쪽
베로니카와는 달리 레베카는 둘의 만남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레베카는 서서히 베로니카의 일상에 침입한다. 베로니카가 일하는 신문사로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고, 글을 기고하고, 강연회에 나타나고 심지어 ‘엄마의 친구’라며 그녀의 아들 세바스티안을 만난다. 그 모습이 마치 무엇인가를 압박하고 추궁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녀가 베로니카의 불륜 관계에 있는 남자가 사는 아파트 바로 위층에 집을 얻은 일이다.
“진실은 고통을 동반한다”
둘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먼저 밖으로 꺼내기 힘든 사건이 있다. 바로 레베카가 원하는 것은 25년 전, 베로니카가 둘 사이의 우정과 순수함을 파괴한 사건에 대해 해명을 듣고 싶은 것이다. 바로 레베카는 과거의 과오를 상기시키고 돌아보게 하는 불청객과 같은 메신저였다.
레베카는 메신저였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났던, 거의 잊고 지냈던 모든 것을, 학교를, 선생님을, 시험을, 교정에서의 대화를, 점심시간의 도시락을, 체육시간을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메신저였다. 특히 우리의 대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대화들.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였다._81쪽
레베카의 급작스러운 출현으로 베로니카의 일상은 균형을 잃는다. 뜻하지 않은 25년 만의 추궁. 하지만 그 덕분에 베로니카는 25년 전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으며 감추어두었던 내면과 만난다. 사회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을 외면하며 살았던 자신을 만나고, 어려움을 회피하며 편안하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했던 자신을 본다. 비겁한 부부생활에 처해진 현재 상황, 젊음과 아름다움, 늙음에 대한 공포. 사회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한편으론 수동적이며 고독했던 삶 속에서 방황했던 자신의 내면을.
나는 레베카의 출현이 무질서한 삶에서 일어나는 불의의 급습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나의 고상함과 나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었고, 이유는 모르지만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저속한 사람들로부터, 답답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들은 레베카의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_344~335쪽
조금씩 드리워지는 그늘을 통해 베로니카는 친구에게 저질렀던 배신의 기억에 한 발씩 다가서고 그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꾸에또는 마지막에 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결론을 열어놓는다. 레베카의 앞날은 미지수로 남는다.
숨 막히는 심리 묘사, 휘몰아치는 공포 그리고 감동
이 소설의 모티브는 두 가지다. ‘여성’과 ‘완벽한 몸을 향한 숭배와 욕망’. 알론소 꾸에또는 “남성보다 더 풍성하고 더 복잡한 내면세계를 지닌 여성의 세계는 위대한 문학적 테마 중 하나다. 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완벽한 몸에 대한 욕망을 탐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꾸에또는 완벽한 몸을 향한 현대인들의 욕망에서 정반대에 놓인 레베카라는 한 인물이 가치관이 왜곡된 사회의 횡포에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왜곡된 인간관계와 사회를 비판하다.
작가 꾸에또는 일상의 움직임, 사회적인 관습, 인간관계(남편, 자식, 부모, 연인, 친구 등)에 대한 소소한 부분을 예리하게 그려낼 줄 아는 섬세한 작가이다. 이 소설 속에는 베로니카와 레베카라는 두 인물의 설정만큼이나 조연들의 관계(베로니카와 연인 관계인 패트릭의 관계, 아버지와의 관계 등) 또한 두 주인공들의 비밀을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섬뜩함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할 수 있는 까닭은 작가의 필력과 능숙함이 빚어낸 역량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