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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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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이 등단하고 10년이 지나서 낸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5년 뒤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다시 15년이 흐른 뒤에 출간한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에서 독자가 사랑하고 시인이 선정한 대표시들을 한 권의 시선집으로 엮었다.
등단 후 시인이 발표한 시들 중에서 '길 위에서의 생각', '소금인형', '새와 나무', '구월의 이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옹이', '돌 속의 별', '소면', '직박구리의 죽음' 등 대표시 98편을 수록했다. 구도의 길을 걸으며 체득한 깨달음과 생명을 향한 열린 마음이, 시의 언어가 되어 독자의 눈과 가슴을 떨리게 한다. 류시화의 시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그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사랑과 투명한 응시이다. 그 시적 직관은 '사물들은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는 독특한 시 세계를 탄생시킨다. 등단 35년 만에 처음 펴내는 이 대표 시선집의 시편들은 그만의 언어 감각과 뛰어난 서정, 그리고 깊이를 획득한 단순한 언어로 주체와 객체가 하나 되는 세상을 노래한다. 1부 1980-1991 : 시를 쓰게 만드는 시
류시화 시인은 다작이 아니다. 첫 시집을 등단 10년이 넘어 펴냈고, 세 번째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한 지 15년만에 선보였다. 30년 넘는 시력을 가진 시인치고는 시집이 매우 적은 편이다. 3~4년에 한 권 꼴로 시집을 내는 관례에 따랐다면 10권 안팎의 시집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창작의 세 요소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류 시인은 한 가지 요소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1970년대 후반 이래 내가 벗으로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류 시인은 발표한 작품보다 몇 배 많은 시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은 종이 위에 있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있다. 그는 시를 종이에만 쓰지 않는다. 바람결 속에도 쓰고, 구름에다 올려놓고 쓰기도 한다. 집보다 길 위에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냈거니와(<바람의 찻집에서>), 길 위에서 쓴 시들을 죄다 외우고 있다. 길 위에서 쓴 시들을 길 위에서 수도 없이 고쳐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억세포에 저장된 것이다. 그러니까 류시화 시전집은 30년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페이지를 늘려 왔다. 저 머릿속 어마어마한 분량의 시전집이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선집 편집 과정은 시인 자신에게는 고통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선집은 독자들에게 축복이다. 시인은 평생 ‘한 편의 시’를 쓴다. 이때 한 편의 시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 시 전집, 혹은 선집이 한 편의 시일 수 있다. 시인이 생애 전체에 걸쳐 추구하는 가치나 의미, 또는 어떤 세계를 한 편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이 주장할 수는 있지만,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한 시인의 생애와 정신세계를 압축하는 한 편의 시는 독자에 의해 정해진다. 그리고 그 시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고, 그 시 또한 독자가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를 뿜어낼 것이다. 그런 시가 좋은 시다. 독자에 의해 매번 새로워지는 그런 시, 독자와 시 사이에서 이뤄지는 내밀한 대화를 통해 매번 새로 완성되는 그런 시가 좋은 시다. 여기, ‘시들의 시’가 있다. 시가 만든 시인보다 시가 만든 독자가 더 많은 시가 있다. 아니 독자를 모두 시인으로 탄생시키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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