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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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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존재와 구원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에 주목해온 작가'로 통하는 문형렬의 두번째 시집.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49편의 신작 시편으로 엮은 이번 시집에는 1989년에 펴낸 <꿈에 보는 폭설> 이래 20년 넘게 담금질하여 벼린 수작들을 엄선하여 수록했다.
: 가끔 지난 청춘 시절의 사진을 찾아볼 때가 있다. 앨범에다 제대로 잘 정리해놓은 게 아니라 이런저런 봉투에 한꺼번에 집어넣은 것 중에서 이것저것 뒤져볼 때가 있다. 그렇게 사진을 찾아보다 보면 문득 잊고 있던 청춘의 어느 한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아리해지고 먹먹해질 때가 있다. 언젠가 사진을 찾아보다가 문형렬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을 때도 가슴이 먹먹했다. 그것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을 마치고 함께 찍은 사진이다. 시상식장 벽면에 걸린 백두산 천지 사진을 배경으로 소설가 황순원 선생, 시인 박두진 선생이 책상 앞에 앉아 있고, 그 뒤로 문형렬, 나, 소설가 선우휘 선생(당시 조선일보에 재직하셨다) 선생이 서 있는 장면의 사진이다. 책상 위에는 ‘심사위원 박두진(朴斗鎭)’이라는 글씨가 쓰인 종이팻말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그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형렬 씨는 시가, 나는 단편소설이 당선돼 시상식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문형렬 씨는 키가 크고 깡마른 모습을 한 장발의 미남 청년이었다. 그때 그를 처음 보고 내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그의 커다란 눈이다. 그는 눈이 너무 커서 겁 많은 한 마리 노루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토록 맑고 착한 눈빛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염려가 될 만큼 그의 눈빛은 선하고 아름다웠다. 몇 십 년만에 그 사진을 들여다봤을 때도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크고 맑은 눈빛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가 그 눈빛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많은 삶의 고통을 겪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삶의 환경에 따라 눈빛도 달라진다. 환경이 험하고 삭막하면 눈빛 또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의 환경이 아무리 험난하고 고통에 차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눈빛은 그대로다. 이번 시집 『해가 지면 울고 싶다』를 읽어보면 그렇다. 이 시집은 그의 노루 같은 눈빛의 심정이 바탕이 되어 써진 시다. 그의 시는 애절하다 못해 통절하다. 그는 항상 타자에게 자신을 던져줌으로써 버린다. 버린 후에는 아무것도 얻고자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할지라도 그의 시는 그러한 사랑의 본질적 희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쌍봉낙타」 「강물에 물어보라」 「망설춘사(望雪春寺)」 「외로운 사람은」 「회색양복」등 어느 작품 하나를 굳이 지적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그의 시는 영원한 사랑의 희생적 자세가 그 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고통스럽다. 마치 곡비의 울음 같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어가다 보면 눈물이 나 계속해서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시집을 덮고 차를 끓여 들거나 창밖의 먼 산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한다. 청년 시절부터 장년이 다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형렬 시인의 생애가 한순간에 다 느껴져 시집에서 펼쳐져 오는 그의 삶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마치 바라볼 수는 있으나 오를 수 없는 영원한 설산의 눈부신 이마 같다. 물론 사랑은 고통이다. 사랑과 고통은 동의어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사랑하면 이 시집에서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원하되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고통은 원하지 않고 사랑만 원한다. 그렇지만 문형렬 씨는 이번 시집에서 고통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게 해준다. 사랑하는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움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고통의 기쁨을 노래한다. 그 기쁨, 그리움과 기다림에서 오는 고통의 기쁨이 어쩌면 이토록 애절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기다리되 아파하지 않고, 그리워하되 안타까워하지 않고, 슬프되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되 외롭지 않고, 고독한 시인이되 고독하지 않다. 문형렬은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시는 책임과 희생과 용서와 비논리라는 사랑의 본질에 뿌리를 내리고 끊임없이 피어난 눈물의 꽃이다. 이 시집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모성이 바탕이 된, 사랑하는 이에 대한 희생적 헌시이며, 한없는 사랑의 찬가다. 시와 소설을 겸비한 작가인 그는 한때 소설만 쓰는 듯해서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시집을 보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역시 시인이다. 그 선한 노루 같은 눈빛의 시를 쓰고 있어 평생 사랑의 고통에 고통 받는 우리가 위로받는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조선일보 북스 2013년 11월 1일자 '북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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