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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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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그림책 까치호랑이 시리즈 21권. 홍성찬 작가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었던 옛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골라,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덧붙여 새로 쓰고 그렸다. 나무와 동물들의 사연이 담긴 흥미진진한 재판과 토끼의 명쾌한 재판을 이야기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산속을 걷던 나그네는 허방다리에 빠진 호랑이를 보게 된다. 나그네는 밖으로 나가더라도 잡아먹지 않겠다는 호랑이의 말을 믿고 호랑이를 구해준다. 하지만 하방다리에서 빠져나온 호랑이는 은혜도 모르고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나그네는 억울한 나머지 호랑이에게 자기를 잡아먹는 일이 옳은 일인지를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자고 한다. 나무, 멧돼지, 닭, 소, 염소, 곰, 여우, 사슴이 재판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마지막으로 토끼에게 묻게 되는데…. : 선생께서 자청해 옛이야기 그림책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평소 선생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미완의 작품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가에게 시력이 상실돼 간다는 사실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출판사 편집자를 통해 간간이 근황을 접할 때마다 이제라도 휴식하며 남은 건강이라도 보살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이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작품이 완성되어 출판사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내쳐 달려가면서 아직 보지도 않은 그림이지만 그림의 질을 떠나 한 원로 작가가 보여 준 투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음을 믿었고, 그동안의 걱정이 한낱 기우였음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러나 일말의 우려대로 선생의 그림은 예전의 그림이 아니었다. 겨우 사물을 분간할 정도로 흐릿한 시력에 의지하며 그린 탓에, 지난날의 엄격하고 치밀한 묘사는 무뎌졌고, 드문드문 반복된 덧칠과 불안정한 데생으로 인해 예전의 예리함과 긴장감이 느슨해졌으며, 일부분 형태가 흐트러져 서툴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처음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견고한 구도의 공간감, 그리고 선생 특유의 투박하고 온기 있는 서정은 예나 다름없었으며, 오히려 화면에 스민 빛의 밝은 기운은 예전보다도 더욱 풍부했다. 한 장씩 넘기면서 가슴이 저린 까닭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무릅쓰고, 이미 남긴 수많은 작품에 한 권을 더 보탠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세속적인 사고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끝없는 흥미로움’을 의미하며, 그 진정한 작가 정신을 이 그림책이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 느낌은 마치 ‘나 홍성찬은 아직 건재하다오.’ 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듯하며, 한편으로는 ‘쟁이란 모름지기 몸이 다할 때까지 하루하루가 흥미로워야 한다네.’ 하며 후학들을 독려하는 준엄한 훈시 같았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극복하고 한 권의 그림책으로 빛나는 《토끼의 재판》은,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던 아득한 어린 시절 선친과의 추억을 넘어, 과거 헐거웠던 나날에도 불구하고 모든 날이 좋은 날이었다는 표정의 순박하고 한결같은 마음에 내린 하늘의 축복이며, 나아가 독자들에게도 그리고 후배 작가들에게도 또 다른 의미의 축복으로 다가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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