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녹음방식
ADD MONO
ㆍ녹음년도
1955년 몽트뢰 음악제 실황
ㆍ수입국
Japan
*칼 슈리히트 라이브 콜렉션
- 슈만 교향곡 제2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외
연주: 프랑스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칼 슈리히트(지휘), 헨릭 셰링
칼 슈리히트가 지휘하는 프랑스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1955년 9월 몽트뢰 페스티벌에서의 실황음원. 하이든의 교향곡 104번, 헨릭 셰링의 협연으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슈만의 교향곡 2번 등을 연주한다. 푸르트벵글러에 비견할 만한 불 같은 기백과 엄청난 집중력이 돋보이는 슈만 교향곡도 훌륭하거니와 셰링과의 브람스도 최고 수준의 연주를 들려준다.
최근작 :<아르농쿠르 -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2DVD]> ,<[블루레이] 레너드 번스타인 박스 세트 (5Blu-ray)> ,<하이든 전쟁 미사> … 총 2659종 (모두보기) 소개 :1732년 3월 31일 헝가리에서 가까운 남부 오스트리아의 로라우라는 빈촌에서 태어나, 1809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77세로 세상을 떠난 고전 음악의 기초를 닦은 대가이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익힌 사람이지만, 가장 건실하고 자발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교향곡, 협주곡, 현악4중주곡... 등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여러 음악양식을 처음으로 개척한, 역사적으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작곡가이다.
‘하이든’은 선배들의 작품에 내재한 지배적인 공허한 감상을 버리고 그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내세워 건실하고 순수한 예술을 창조하였으며, 그의 음악에는 발랄한 생기와 독창성이 있고, 신선한 자연미가 흐른다. 그는 같은 시대의 모차르트가 만하임악파의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달리, 주로 바흐의 <클라비어 소나타>에서 작곡기교를 배웠고, 대부분의 4중주곡과 교향곡, 그리고 최후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4계> 등은 영원한 명작으로서 그의 음악성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다.
최근작 :<엘렌 그리모와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슈만, 실베스트로프> ,<[블루레이] 엘렌 그리모와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슈만, 실베스트로프> ,<[블루레이] 유로파 콘체르트 2015 아테네> … 총 3204종 (모두보기) 소개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음악평론가. 1810년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에서 저술가 겸 서적상 아버지와 교양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심취했고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결국 당대의 명피아니스트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832년 오른손 부상으로 연주자의 꿈을 접은 이후 작곡과 저술에 집중했으며, 1834년 동료들과 함께 최초의 음악잡지 가운데 하나인 《음악신보》를 창간, 10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리데리크 쇼팽 등 새로운 음악가들을 소개했다. 펠릭스 멘델스존과 함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재조명하고 사후 묻혀있던 프란츠 슈베르트의 걸작들을 알리는 데도 크게 공헌한다. 1840년 스승 비크의 딸 클라라와 결혼하여 짧은 기간 동안 숱한 가곡들을 썼다. 슈만, 클라라, 브람스, 이 세 음악가의 만남은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가장 아름다운 인연 중 하나로 기억된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우울증이 심해져 잇단 자살 시도와 2년간의 투병 끝에 1856년 본 교외의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4편의 교향곡 외에 피아노 협주곡, 첼로 협주곡, 피아노곡 [나비] [사육제] [교향적 연습곡] [어린이 정경] [크라이슬레리아나] [후모레스케], 가곡 [리더크라이스] [시인의 사랑] 등 작품들을 남겼다.
최근작 :<브루크너 : 교향곡 9번 (원전판)> ,<모차르트 : 세레나데 7번 '하프너' & 피아노 협주곡 19번 [180g 2LP]> ,<슈만: 교향곡 2번 / 하이든: 교향곡 104번 [180g 2LP]> … 총 142종 (모두보기) 소개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 단치히(지금의 그다니스크)에서 출생했다. 저명한 오르간 제작자의 집안에서 자란 슈리히트는 1901년부터 1903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훔퍼팅크 등에게서 배운 다음 라이프치히에서 막스 레거를 사사했다.
마인츠의 극장에 수습으로 들어가 음악의 실제 수업을 쌓은 뒤에 버트 크로이츠나허를 비롯한 도르트문트, 고슬라르, 츠비카우 등 독일의 지방 도시 극장의 악장을 거쳐 1909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오케스트라 협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1911년에 비스바덴으로 옮겨 그 곳 극장의 제1지휘자로 취임, 마침내 비스바덴 시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고 그 자리를 1944년까지 지켰다. 그 사이 슈리히트는 현대 음악제의 정기적인 개최를 실현시켰고, 그 곳에서 새로운 음악을 지휘, 그 소개에 힘썼고 특히 독일에 드뷔시, 델리우스, 라벨,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곡가들의 음악의 추진자가 되었다. 물론 비스바덴에서만 지휘 활동을 계속한 것은 아니며 빈과 베를린을 비롯한 주요 음악의 도시에서 객원 지휘도 했다. 그 중에서도 빈 필하모니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의 스헤베닌게에서는 매년 여름 열리는 연주회를 수년 동안에 걸쳐 지휘, 그 공적으로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1938년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슈리히트는 1944년부터는 스위스로 옮겨가 살면서 고정된 지휘자의 자리를 갖지는 못했으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객원 지휘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7년 1월 7일에 스위스의 레만 호반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