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야차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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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천산야차(天山夜叉) 살생부(1)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면, 천남산맥은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

몇 길이 넘는 눈 더미가 쌓인다. 먹이가 부족해 포악해진 괴물들은 그곳의 주민들조차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근처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조차 멀리 떠나는 것이 겨울의 천남산맥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남산맥 사자곡을 찾았다. 검을 패용하고 창을 감춘 이들은 하나같이 무림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 수많은 고수들이 한데 모여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 한 명의 남자…….

검야차(劍夜叉)였다.


흰색의 장포를 걸치고, 수염을 뻣뻣하게 기른 무사가 종이를 펼쳐 낭랑한 소리로 읊었다.

“동룡산 태화관 관주 멸사진인. 동해십칠검 왕사랑. 북궁주 모용첨. 동흥관 부관주 칠삼사 동막선…….”

그가 외치는 이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태화관이라면 동룡의 황제로부터 직접 현판을 하사받은 무림에서 손꼽히는 도관이었다.

동흥관 부관주 칠삼사는 또 어떤 사람인가? 열다섯,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출사표를 던지고 동쪽 해안가에서 악명을 떨치던 해적들을 한 자루 검으로 격살시켰다.

그때 죽인 해적의 숫자가 모두 일흔세 명으로, 환갑을 넘은 지금까지 칠삼사라는 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명첩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림에 손꼽히는 무사들로, 그들 중 둘만 한 자리에 모여도 대사건이라는 소문이 퍼질 그릇들이었다.

다음으로,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둥글게 모여 앉은 수백 명의 무림인들 사이에서 흰 장포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종이를 펼치고 목청을 뽐냈다.

“서호의 칠동주 중 대래동, 타사동, 신상동의 세 동주! 옛 남작 땅의 응조문 문주 구칠응…….”

흑포의 사내가 읊은 이름들에 이번에는 반대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짧은 탄성을 연달아 뱉었다.

“타사동주가 여기 왔다고?”

“허허, 서호 십삼동이 이번에는 제대로 벼른 모양이네. 하긴 검야차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단번에 무림의 영수가 될 수 있을 테니…….”

허리에 패검을 찬 문사 차림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흥, 흑의(黑衣)에서 가능할까? 검야차를 꺾는 영웅은 분명 우리 백의(白衣)에서 나올 거야.”

“쉿, 그런 소릴랑은 흑의맹도가 없는 데서나 하게나. 여기가 어디라고…….”

다른 백의 측 사람의 말리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의에 무슨 재주가 있을까? 협의니 선행이니 위군자 같은 오지랖이나 펴다가 정작 자신의 수련에는 등한시하는 것 아닌가?”

문사 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누군데 감히 백의를 욕하는 것인가!”

“내가 욕하고 싶으면 욕하는 것이지.”

문사 청년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스물두셋 쯤 되었을까 싶은 사내였다.

팔목이 좁은 검은색 도복을 입은 그는 차가운 눈으로 문사 청년을 비웃고 있었다. 문사 청년이 엄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계신 백의 어르신들께 사과의 말씀을 올려라. 그렇지 않는다면 백의 무림은 절대로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백의 무림을 등지지 말고 네 칼로 용서하지 말아 보지, 애송이.”

“이놈!”

문사 청년이 검을 뽑았다. 그 순간, 뭔가가 번쩍 하며 그의 눈을 스쳤다. 그것이 그가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문사 청년의 머리가 사람들 사이로 굴러 떨어졌다. 하얀 설원에 긴 핏줄기가 그려지고, 사람들은 그 풍경에 아연실색 자리를 피했다.

검은 도복을 입은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었다.

“역시 실력 없는 것들이 말만 많다니까.”

중년의 또 다른 사내가 검은 도복 앞에 나선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닫고 침중한 눈으로 검은 도복 청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죽인 게 누군 줄은 알고 있나?”

“모르는데?”

“동해십칠검의 조카일세.”

“헤, 제법 명문이었네. 그런 것 치고는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야. 겨우 한 초식도 막아 내지 못한 걸 보면.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동해십칠검의 첫 번째 제자 노일청일세. 그의 사형이지.”

검은 도복의 사내는 놀란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위적인 표정이었다. 동해십칠검의 대제자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겁먹지 않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편, 노일청과 검은 도복을 입은 사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살벌한 분위기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 주변으로 넓은 공터가 생겨났다.

노일청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의 이름과 사문을 밝히게. 흑의의 사람인가?”

“나? 내 이름 말인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번에는 한 노인이 다시 시비의 장소에 끼어들었다.

“노 군, 잠시 기다리시게.”

노일청이 그를 보았다. 눈썹이 희게 샌 노인이 팔에 검은 천을 동여매고 있어 흑의의 인물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에는 털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민머리에 포효하고 있는 사자의 문신을 새겨 놓았다.

그 문신을 보는 순간 노일청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타사동주!”

“그렇네, 내가 타사동주일세. 이것 참…….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게 참……. 곤란하군그래. 부디 내 얼굴을 봐서 원만하게 넘어가 줄 수는 없겠나?”

노일청의 얼굴이 굳었다. 사제의 죽음을 어떻게 몇 마디 말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타사동주라면 자신의 스승인 동해십칠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고수였다.

“동주. 목숨 값을……. 말로 갚으시렵니까?”

노일청이 용기를 냈다. 수많은 백의, 그리고 흑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상대가 대단하다고 해서 단번에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스승인 동해십칠검도 와 있었다. 그의 힘을 등에 지고 노일청은 뱃속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차라리 동주께서 내 목숨도 가져가시구려.”

“허허, 노 군……. 이레 전 내 자네가 동파호에서 치렀던 일전을 멀리서 봤네. 파호삼살을 단 이 초 만에 격살한 그 뭐라 하던가, 진위룡이던가……. 무시무시한 검식이더구만.”

노일청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파호삼살은 동파호의 파렴치한 수적들이었다. 그들이 이끌던 수적의 무리를 격살한 것은 노일청이 평생 했던 협행 중 첫손 꼽히는 일이었다.

타사동주 쯤 되는 사람이 그 일을 칭찬해 준 것만으로도 노일청의 이름값이 몇 곱절은 뛰는 셈이었다.

타사동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숨값이라면 내가 대신 갚아 주겠네. 헌아!”

“예, 스승님!”

그의 외침에 한 사내가 달리듯 뛰어나와 동주 앞에 엎드렸다. 그를 발치에 두고 타사동주가 노일청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북궁헌이라는 내 일곱째 제자일세.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깨물어 아픈 손가락일세.”

노일청은 타사동주가 그를 왜 데리고 왔는지 내심 의아해했다. 하지만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 타사동주가 말했다.

“헌아. 죽거라.”

“예, 스승님.”

북궁헌이 칼을 뽑아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일청이 깜짝 놀라 북궁헌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하얀 칼날은 배 속 깊이 사라진 후였다.

“노 군. 이제 됐나?”

노일청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미 사람 하나가 더 죽은 마당에 부족하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타사동주가 씁쓰레한 얼굴로 죽은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한 녀석이로고……. 착한 녀석이로고.”

이어 검은 도복을 입은 남자에게 고개 돌려 타사동주가 입을 열었다.

“이게 무림이외다. 내 아끼는 제자 하나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군은 잊지 마시구려.”

검은 도복의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타사동주는 곧바로 큰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외쳤다.

“오늘 이 자리는 흑의, 백의 할 것 없이 하나의 목적으로 모인 자리올시다. 작은 시시비비로 모처럼 만든 훈훈한 분위기를 깨지 말도록 각자 삼가도록 합시다.”

“옳소!”

서호 칠동의 제자들이 먼저 소리를 지르자 흑의, 백의 양측의 원로들이 고개를 끄덕거려 동감을 표했다.

그사이, 동해십칠검이 친히 나와 제자들을 수습해 자리로 돌아가고, 타사동주와 검은 도복의 사내도 흑의맹도들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일단의 사건이 끝나고 나니, 사람들의 눈은 자연스레 천남산맥으로 향했다.

높다란 두 개의 절벽 틈으로 나 있는 작은 틈으로 칼바람이 괴물처럼 울었다. 사자곡(死者谷), 죽은 사람들의 계곡이라 이름 붙은 저 좁은 틈으로부터 야차가 찾아든다.

만약 이곳에서 그를 놓친다면 올해도 무림은 검야차의 공포 속에 겨울을 나야 할 것이다.

검은 도복의 사내가 타사동주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 강합니까?”

“칼을 든 도깨비라고 부를 정도외다. 검을 쓰는 솜씨는 인간을 아득히 벗어났소.”

“스승님과 비교해도…….”

“군의 사숙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잊었소? 사숙과 스승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보다 군이 더 잘 알 것 아니오?”

검은 도복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스승은 두 해 일찍 검을 배웠고, 사숙은 다섯 살 나이가 적었다. 둘 사이에 누가 더 강할지 검은 도복은 알지 못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스승이 종이 두 장 더 낫다니 그런 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군이 그분들의 무술 모두를 배웠다 하더라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외다.”

“듣자니 검야차도 서른이 채 안 됐다던데…….”

“검야차는 약관에 천남산맥 이남에서 다섯 손 안에 꼽히는 검사였다 하외다. 십오 년 전, 서쪽의 요새에서 동룡의 수많은 무사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소문이지만, 어전시위총관이 남작의 여왕을 쫓아 천남산맥을 넘었다가 열네 살 소년이었던 검야차에게 일격에 격살당했다 하더이다.”

어전시위총관이라 하면 황제를 지키는 어림군의 지휘관이었다. 여기 모인 무사에 못지않은 실력자였을 것이다.

“일격에 말입니까?”

“그렇소. 그가 왜 겨울마다 천남산맥을 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멸망한 남작국과 관계가 있을 것이요. 그래서 황제도 이렇게 천금을 들여 무림인들을 초청해 그를 막으려 드는 것 아니겠소?”

“나는 돈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차고 있다는 반지가 탐납니다.”

“검림의 왕 말이외까? 오랑캐 나라 최고의 고수에게 주어진다는…….”

“적어도 일개 지방의 패주라는 증거가 되어 줄 것 아닙니까.”

“허어, 검야차를 패배시킨다…….”

타사동주는 검은 도복의 사내를 보며 짧은 한숨을 지었다.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그러고 보니, 검야차의 이름이 뭐라 합니까?”

검은 도복이 묻고, 타사동주는 천천히 답했다.

“오랑캐 이름이라 발음하기가 좀 나쁘외다. 뭐라더라……. 라휄이라던가?”

“라휄…….”

“란스카라는 땅의 주인이라 라휄 폰 란스카라 부르는 모양이외다.”

남풍이 몰아쳤다. 산록을 타고 내려온 눈 섞인 거친 바람에 사람들이 일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죽은 자들의 계곡을 통해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천산의 검야차,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