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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은이) | 이재영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17-02-27 | 원제 Die Austreibung Des Anderen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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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장본 | 134쪽 | 200*125mm | 167g | ISBN : 9788932029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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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타자의 추방 새창으로 보기
Theodora ㅣ 2017-06-13 ㅣ 공감(12)댓글 (4)
내용이 쉬워진 건지 나의 독서력이 높아진 건지.., 잘 읽힘. 경청과 타자 부분이 흥미로웠다. 말을 하려는 사람은 많으나 경청하는 이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많은 반면 책을 읽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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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낯선 타자가 자아의 감옥에서 나를 구원할 것이다 새창으로 보기
칙촉 ㅣ 2017-05-02 ㅣ 공감(1)댓글 (0)

감염은 타자의 부정성이 의해 일어난다. 타자는 동일자 내부로 침투하여 항체가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난다. 경색은 감역적이 아니라 과지방적이다. 지방에 대해서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어떤 면역 방어도 같은 것의 창궐을 막아낼 수 없다. (9쪽)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11쪽) 


만일 꽃이 자기 안에 충만한 존재를 지니고 있다면, 인간이 바라봐주는 데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꽃은 어떤 결핍을, 존재의 결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담긴 시선, "사랑이 인도하는 인식"이 꽃을 이런 결핍의 상태로부터 구원한다. 따라서 인식은 "구원과 유사한 것"이다. 인식은 구원이다. 인식은 타자로서의 대사에 대해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13쪽)


같은 것의 지옥에서는 타자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8쪽)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 니체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33쪽)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정신의 삶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떄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규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힘"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테러를 낳는다. (49, 50쪽) 


"...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꼐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꼐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94,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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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 - 타자의 추방 새창으로 보기
쥬드 ㅣ 2017-04-27 ㅣ 공감(6)댓글 (0)

페이스북에 포스팅 거의 하지 않지만 따봉은 비교적 열심히 누르고 다닌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에 상당히 동의하지만 잘 사용한다면 나름대로 SNS로 얻는 것도 많다. 10년 전만 해도 잡지, 신문에서나 볼 수 있던 양질의 글을 요즘엔 어렵지 않게 SNS로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력과 글솜씨 뛰어난 일반인이 바로 작가가 되는 시대라 팔로잉 설정만 잘하면 허튼 피드 없이 유익한 정보를 신문 보듯 받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뉴스피드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글로 채운다는 건 결국 취사된 입장의 의견만 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페이스북엔 '차단' 기능도 있다. 이것은 뉴스피드를 좀 더 정교하고 편협하게 다듬는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 사회가 부정성의 과잉이 아닌 긍정성 과잉 상태가 병리적 상태를 빚는 '자기 착취'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타자의 추방> 역시 긍정성 과잉을 지적한다. 차이는 <피로사회>는 성과 주체 자신의 긍정 과잉을 문제로 삼고, <타자의 추방>은 주체를 둘러싼 타인의 긍정성 과잉을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소통을 중요시하는 SNS 시대에 이 무슨 말인가.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10-11p)"

 

내가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글들은 내가 선택한 나와 '같은 것'들이다. 꼭 차단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SNS의 영리한 알고리즘은 내 '좋아요'와 '팔로잉'을 기반으로 하여 내 취향에 맞는 피드만 내놓는다. 당장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를 살펴보면 안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단체가 추천 그룹으로 떠있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몸짱 여인들의 몸매 사진이 추천 피드에 떠있을 것이다 (ㅎㅎ).

 

어쨌거나 이런 같은 것들의 창궐은 저자의 말대로 '긍정성의 지옥'이다. <피로사회>와 마찬가지로 '부정성' 자체가 꼭 나쁘지 않다는 전제에서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50p)"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p)"

 

현시대는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라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인 '잡다함'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다. 우리는 우리가 취사선택한 타자들의 내부로 들어가 에고를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SNS에서 취사하여 다듬은 사유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긍정적 조작(89p)'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로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한다는,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기만적 소통의 시대에서 진짜 타자는 추방되어버렸다. 저자는 이 논리를 밀고 나가 시대의 궁극적 문제를 지적한다. 타자를 경청하지 않는 시대에서 고통은 전적으로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고통은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 현학적이고 매끄러운 철학자의 논리지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경청해야 할 타자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의 세월호를 이용하고 조롱하는 타자들을 생각해보자. 3년이 지나 세월호가 뭍으로 나온 지금 어느 사람은 세월호 침몰 음모론을 어떤 책임감도 없이 끊임없이 주창한다. 어느 사람은 오뎅 리본 사진을 찍어 올린다. 솔직히 난 둘 다 혐오스럽다. 그런 인간성들이 탐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이해나 경청의 대상이 되기는 끝까지 어렵다고 느낀다. 이 경우엔 타자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정신건강이 유지될 것 아닌가. 역시 이론과 실제는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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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새창으로 보기
cyrus ㅣ 2017-04-20 ㅣ 공감(31)댓글 (8)

 

 

개인이나 집단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관심사, 의견, 표현 방식이 다르다. 대화도 ‘차이’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성숙한 의사소통에 임하는 사람들은 타자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충돌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감정의 원천이다. 선입견과 아집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새로운 의견과의 충돌을 일으켜야 그 모습을 감춘다.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것, 즉 타자를 동화 혹은 동일화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다. 그곳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사회구성원끼리 서로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유일 진리와 절대 합의를 상정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나 대화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면 결국은 파국을 초래한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한국 사회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부정성이 제거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피로사회》가 타자의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시도라면,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2017)은 과잉 긍정성만 내세우는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적인 문제 해결을 제시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첫째,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기한다. 다툼과 오해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갈등 양상이 지속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 참여에 소극적인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으며 그들에게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 딱지를 붙인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한병철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현대 사회에서 ‘반옵티콘(banopticon)’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이다.

 

누구나 SNS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좋아요’를 눌러 개인적 선호를 밝힌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아를 노출할수록 ‘같은 것의 창궐’(《타자의 추방》 9쪽)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61쪽)

 

페이스북, 그리고 북플은 ‘좋아요’의 공동체이다. ‘좋아요’의 긍정성은 아무 구별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늘 바라왔던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평화스러운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표피적 양상으로만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갈등에 대한 이해를 봉쇄하는 전략이 된다. 차이와 갈등을 사회구성원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담론이 불가능한 사회가 훨씬 더 불안하다.

 

둘째,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경청’이라는 자세로 소통할 것을 요청한다.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여기서 한병철이 말하는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병철의 ‘경청’은 귀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차원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심리정치》에서 한병철은 ‘반옵티콘’에 탈출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바보’가 되라고 주문했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심리정치》 114쪽)

 

침묵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이 침묵을 선택해도 그 자체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소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불의의 상황을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 불의를 방조하는 공범자가 된다.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을 견지한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논쟁하고 싸운다. 사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진정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타자들의 입장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자들의 입장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 각자 나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바틀비(Bartelby)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1]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반대로 ‘소통하는 편’을 택하는 경청자로 살고 싶다.

 

 

 

[1]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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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그 매끄럽지 않음에 대하여 새창으로 보기
다다닥 ㅣ 2017-04-20 ㅣ 공감(1)댓글 (0)

오늘날의 소통은 너라고 말하는 것, 타자를 호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로서의 타자를 호출하는 것은 "근원적인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디지털 소통은 모든 거리를 파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p.101 / 타자의 언어>

이웃과의 소통, 애정을 수신했습니다. 랜선친구, 모니터 뒤에 사람이 앉아있어요 등등의 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니터(그것)를 사이에 두고있을 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리뷰 몇 자만으로 만족하거나, 직접 꽃을 길러보지 못한 채 '박제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공들여 이해했었던 동일자의 지옥은 어쩌면, 이곳 작은 핸드폰 안에서 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상태로 남아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단계를 보여준다. <P.10 / 같은 것의 테러>

>> 같은것들로 가득 찬 곳에서 다른 나?

"나는 나다"를 알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타자일 것이다. 나는 수 많은 타자들에 비춰봐야지만 알 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나에 반反하는 타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병철의 책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긍정적으로'받아들였던 단어들에 대해서 나열한다.

투명한 / 긍정적인 / 매끄러운 / 가속화 / 질서정연함

비가시적인 / 부정성 / 거친 / 천천히 되어가는 / 무질서함

그동안의 책에서 깨어진 단어에 대한 편견들을 가지고 이번 책을 대하면 '역시' 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투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사회. 긍정과잉으로 '안돼'를 외치지 못하는 자아의 피로함과, 역시나 반항없이 매끄럽고 돌아볼 수 없이 가속화 되어있으며 무논리로 맞설 수 없는 질서정연한 사회. 한병철은 이번엔 '타자'에 집중한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있는 거의 모든 책들을 완독했다고 생각했는데 지치지도 않고 또 내 놓은 책은 '타자의 추방'이다. 이쯤되면 제목만 보고도 아 이 사람이 뭘 이야기하려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온다. 저자의 집필의도와는 별도로 세상에 나온 이 책들과 나는 어떤 의도로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선입견이다. 이미 <에로스의 종말>에서 동일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한병철과 이만큼 소통이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같은 것을, 정해진 구역 내에서의 특별함을, 결코 튀지 않는 즐거움을 원한다. 이미 타자는 나와 같아져 버린 것이다. 다름 없는 사람. 그저 상업사회의 부품으로서의 타자는 나와 너의 관계 즉 만남을 형성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와 그것의 관계로서 소멸되어 버린다.

>> 타자는 책상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서를 접하다보면 '타자'는, 단순한 인간관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국한된 단어가 아니다. 타자는 나의 경계선 밖에서 나와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육체를 이야기할 수도있고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내가 인지한 나의 에고일 수도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가끔 나는 나를 타자화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의미를 갖는 타자의 핵심은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속 세상의 '이웃'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좀 더 들어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런것들을 묻는것은 실례가 된다. 사생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타인이 궁금해지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타자'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저 넷 망속의 이웃 혹은 서로 이웃은 나의 매끄러움(저자는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은 저항하지 않는, 개성이 없는 '이상적인 소비자'라고 했다.)을 표현할 '그것'에 불과할지도.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화를 가속화하는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 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기도 없는 공간이다. <P.61 / 소외>

우리가 타인에 무관심해 진 것은 어느 순간부터일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개인주의와 섞어서 인식하고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까지이고, 개개인의 자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생활이다. 노터치. 그러나 우리는 사회속에서 타인과 살아가야 하며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교류를 원한다. 그래서 비교적 쉽고 매끄러운 방향으로 소통을 택한다. 즉 타인에 대한 지극한 무관심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느낌'만을 갖고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옆집문을 열지 못한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하기 위해 옆집 문을 열 사람은 없겠지.)

타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 소통은 정보들의 가속화된 교환으로 전락한다. 이런 소통은 어떠한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로지 연결만 낳을 뿐이다. 그것은 이웃이 없는, 어떠한 친근함의 가까움도 없는 소통이다.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P.115 / 경청하기>

>> 그렇다면, 타자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세계가 '그것'이 아닌 '그'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랜선 세계가 결정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쏟아낼 뿐 경청하지 못한다. 음성이 없는 텍스트의 집단에서 나는 그저 마음에 드는 글을 읽었고, 생각을 뱉을 뿐이다. 훌륭한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향이다. 나는 글을 글로써 재창작할 뿐이고 원작자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생각이 훌륭하거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것 역시 텍스트로 옮기기엔 뭔가 부족해진다. 혁신적으로 출발했던 인터넷망은 이렇게 모든 자의 글들을 수집할 뿐이다. 양방향이라고 생각했던 서로간의 댓글은 사실 각자의 일방향이었던 것이다.

오랜시간 블로그를 해 오면서, 나는 많은 분들을 안다. 그리고 그 중에선 나와 '그것'의 관계를 끝내고 '그'의 관계가 된 사람들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인터넷 상의 인연이 으쌰으쌰 현실세계의 이웃이 된 것이다. 아이디로 존재했던 그것이 타자가 되는 순간, 관계는 회복되는 것일까?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P.119 / 경청하기>

시스템속에서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타자가아닌 '그것'. 인간성의 회복은 '경청'함과 타자를 매끄럽지 않게 대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분명 상업정신의 악마성을, 나아가 그 무이성성을 몰랐다. 그의 판단은 관대했다. 그는 상업정신이 "긴"평화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그저 가상일 뿐이다. 상업정신은 오로지 계산하는 오성만을 부여받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상업정신에 의해, 돈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시스템 자체에도 이성은 없다.<P.31 /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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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타자의 추방 새창으로 보기
베텔게우스 ㅣ 2017-04-08 ㅣ 공감(1)댓글 (0)


41-2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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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새창으로 보기
김창섭 ㅣ 2017-04-07 ㅣ 공감(0)댓글 (0)

 이 책은 철학인문책일까?

 항상 그렇듯 제목에 이끌려 샀다가 사회분석에 관한 책임을 알고 꽤나 어려워했다.

 이런 글은 아직 나에게 익숙치 않다.


 책의 리뷰보다는 이러한 책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면,

 나는 2가지 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이런 글을 보면 물론 개인적으로 동의를 하는 부분도,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다 떠나고 아! 이렇게 생각 할 수 있구나. 하는 부분이 있다.

 나와는 다른 지점에서 깊게 생각하는 부분과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넓게 생각하는 부분이랄까?

 그런게 참 좋다.


 나머지 하나는,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넘긴 하나하나의 상태나 과정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석을 하는 부분이 아,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참 피곤한 일이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공유해줌에 '나라면?' 하고 내 생각의 시발점을 주는게 무엇보다 가 장 큰 의미인 것 같다.


 이 책은 크게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지만

 '좋아요' 문화와 디지털미디어 세계에 대한 비판, 우려, 심려들을 보았을때

 개발자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지금 시대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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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대로 듣고 있는가 새창으로 보기
jumjan ㅣ 2017-03-20 ㅣ 공감(2)댓글 (0)

인터넷의 출현은 인류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덩달아 우리 삶을 서서히 좀먹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선과 악이 늘 공존하듯 긍정의 힘과 부정의 힘이 인터넷을 지배한다. SNS는 독인가 아니면 디지털 환경을 통한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을 돕는 도구인가. 

틀렸다. SNS는 독이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수단이다. 

한병철의 지적은 과연 옳은 것인가.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남들과 같아지기를 갈망한다. 남의 것을 흉내 내고 남과 다르지 않기 위해 남이 간 곳을 방문하고 인증숏을 남긴다. 나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늘 부각시키며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한병철의 이번 책 타자의 추방에서는 '경청'을 강조한다. 다른 이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을 우리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러한 공간을 버리고 있다. SNS는 진정한 소통의 도구가 결국 아닌 것이다. 먼 것을 가까이 끌어들임으로 해서 가깝다는 인식을 심어주지만 더욱 우리는 소통에서 멀어질 뿐이다.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94쪽 중

진짜 소통은 무엇인가. 진짜 소통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오늘을 사는 삶의 지혜를 그의 풍부한 철학적 사고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거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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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새창으로 보기
동동이 ㅣ 2017-03-20 ㅣ 공감(1)댓글 (0)
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1. 전통시장을 찾았다. 시장 입구에서 끼고 있던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시장의 좌판에는 과일, 생선, 떡, 채소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를 붙잡는 것은 ‘음성’이다. 상인들의 목소리보다 먼저 만두가 익어가는 소리, 미꾸라지가 파닥이는 소리, 떡갈비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장은 타자를 환대하는 공간이다. 손가락 한 두 개로 쇼핑을 끝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손바닥 전체에 연결된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야 비로소 물건 하나를 집을 수 있는 곳이다.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지’ 보다는 ‘인식’의 공간이다. 정상가격에 두 줄을 긋고 할인가격을 표시한 입간판이 아니라 흥정과 덤이 오가는 유혹의 공간에는 나를 향한 시선과 음성이 가득하다. 시장에서 나는 백화점이나 마트, 휴대폰 공동구매로 느낄 수 없었던 타자가 다가옴을 경험한다.



2. 저자는 타자의 부정성이 소멸시키고 무한 자기긍정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비판한다. 과거의 권력은 금지를 명했다면 오늘날의 권력은 작위를 명한다. 신자유주의의 ‘할 수 있다’라는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부작위의 자유가 없다. 아프면 힐링하고 치유하고 일어서야 한다.


저자는 소멸해 가는 타자의 회복을 주장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시간의 회복과 공동체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은 들지만 경청, 공감, 연대, 공동체 실현의 방법론이 여전히 남는다. 물론 이 책이 거기까지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문제의식을 다시 확인하는 것만 해도 소득이다.



- 메모 -

* 같은 것의 테러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파괴적인 압박은 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7쪽





*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23쪽



* 두려움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49쪽



* 음성
- 카프카에게는 음성과 시선이 몸의 기호이기도 했다. 이 몸 기호가 없는 소통은 그저 유령들과의 교류일 뿐이다. “(···) 글로 쓴 키스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요. 도중에 유령들이 모조리 마셔버립니다.” 디지털 소통 수단은 편지보다 훨씬 더 몸이 없다. (···) 디지털 매체들은 타자로서의 상대를 매끄럽게 다듬는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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