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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소르본대학, 리용대학, 벵센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에 도전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 '20세기 형이상학의 완성자' 등의 평가를 받는다. 1995년 갑작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차이와 반복>, <칸트의 비판철학>, <니체의철학>,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 <베르그송주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저작을 남겼다.
구조주의자, 사회학자, 기호학자, 에세이스트, 문화비평가 등 이름 앞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롤랑 바르트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지성인 중 하나다.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사진, 문학, 연극, 음악 등 문화 전반을 넘나들며 저술활동을 펼쳤다. 문학과 대중문화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기호학과 신화나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글쓰기 이론과 실천 문제에 천착하여 '저자의 죽음', '독자의 탄생'을 선언하기도 했다.
1930년 7월 15일, 알제리의 엘비아르에서 태어난 자키는 훗날 자크 (필명) 데리다로 성장한다. 알제리 독립 운동의 여파로 프랑스 사회에 번진 셈족에 대한 편견과 폭력은 어린 데리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까뮈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으며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반유태주의와 유태 민족주의에 대해 똑같이 반감을 갖게 된다. 자신의 소속 또는 자기 동일성으로 인한 실존적 고통은 '고유한 것의 해체'라는 철학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2004년 10월 10일 사망.
알제리 출생.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과 교수. 1948년 프랑스 공산당 입당 이후 당에 대한 비판을 여러 차례 했으나 사망시까지 당적을 유지했다. 구조주의적 경향을 띈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평가받지만 스스로는 구조주의자임을 부정했다. G.바슐라르의 가르침으로 헤겔 철학을 연구했다.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1980년 정신착란상태에서 아내 엘렌 리트만을 교살했다. 법적으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후견인의 보호 아래 감금상태에 있었으며 기도폐색으로1990년 사망했다.

마르케스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 스페인어권 세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소설가, 라틴 아메리카 최후의 작가.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바쳐진 찬사들이다. 사실과 허구가 중첩되고 철학적 사고와 위트 있는 풍자가 결합한 그의 작품세계는 범죄, 죽음 등 어두운 뒷골목 이야기와 암담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통렬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영국의 작가 · 저널리스트.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인도 아편국 관리였던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 북동부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 통쾌한 독설이 번뜩이는 수백 편의 길고 짧은 에세이를 남겼다. 짧은 인생 말년에 쓴 <동물농장>과 <1984>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남긴다.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1948년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1957년 하버드 대학의 철학 박사학위를 수료하고 1959년부터 뉴욕시립대학, 사라 로렌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철학 강의를 맡았다. 1960년부터 각종 신문과 잡지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쳤고,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등의 평론집을 남겼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문학비평·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간결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독창적인 문체로 20세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몇 차례의 전쟁 참전과 모험으로 가득 찬 그의 일생은 남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강인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남아 있다. 대표작으로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이 있다.
1925년 <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라 T.S.엘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 '문학적 천재'라고 칭송받았다. 1934년, 9년 만에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를 출판했으나 세간의 평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마지막 거물의 사랑 The Love of Last Tycoon>을 집필하던 중 1940년 12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38년 사고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이후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 평생을 살게 된 그는 평생 한 번도 장편소설을 쓰지 않은 채, 새로운 형식의 단편소설들을 써낸다. 독특한 '책에 대한 책 쓰기' 방식과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이 녹아 있는 작품들은 그를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게 했다.
콜롬비아 작가.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일컬어 보르헤스, 아르호 카르펜티에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함께 20세기 남미의 위대한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추가 설명이 불필요한 추리소설의 여왕. '메리 웨스트매컷'이란 필명으로 연애소설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80여편의 추리소설을 쓴 '애거서 크리스티'란 필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전쟁중인 1916년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수수께끼>를 썼고, 1976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90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가 창조해 낸 '에르퀼 푸아로', '제인 마플'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영어권에서 10억부 이상, 103개의 언어로 번역된 다른 언어판 역시 10억부 이상 판매되며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셰익스피어와 견줄만 한 것이다.)
1859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개업의로 일하는 한편 소설을 썼으며, 20세가 되기 전에 첫 작품을 에든버러 저널에 발표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에밀 가보리오를 동경하던 그는 새로운 인물의 창조에 착상, '셜록 홈즈'라 불리는 명탐정을 탄생시켰다. 홈즈가 등장하는 연재는 몇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그때마다 독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로 <바스커빌 가의 개>를 위시한 장편 3편, <빨간 머리 연맹>외 55편의 단편을 발표했으며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864년 프랑스 루앙에서 부유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작들은 주로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영향을 받은 심리소설들이었으나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추리소설로 방향을 바꾼 그는 1905년 '아르센 뤼팽'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단편집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을 출간했으며, 도적과 명탐정의 1인 2역을 수행하는 괴도 신사의 통쾌한 행동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뤼팽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련의 소설을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도 얻었으며 작품은 차차 추리소설에서 모험소설, 스릴러로 옮아갔으며 뤼팽 또한 국민적 영웅으로 변모해 갔다.
1909년 키타큐슈 코쿠라에서 태어났다. 펜네임으로 같은 한자(淸張)를 쓰지만 본명은 키요하라라고 읽는다. 1963년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黑い霧)> 등의 업적으로 제6회 일본저널리스트회의상을 수상한다. 67년 제1회 요시카와 에이지 상 수상, 70년 제18회 기쿠치간 상, 90년 아사히 상을 수상한다. <얼굴>, <점과 선>, <모래그릇(砂の器)> 등은 아시아뿐 아니라 영미권에까지 번역출간되었다. <잠복>, <모래그릇>, <불과 해류>, <종족동맹>, <의혹(疑惑)> 등 다수의 작품들이 영화, 드라마화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최근까지 리메이크되어 총 410회가 넘게 드라마, 영화화가 이루어졌다.

대학을 중퇴하고 싸구려 일자리와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며 미국 전역을 유랑한 찰스 부코스키는 삼심대 초반 궤양출혈로 인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매달 백 달러의 월급'을 보장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마흔아홉의 나이에 작가로 전업, <우체국>, <팩토텀>, <여자들>을 발표했다.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59년 개인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발표했고, 1960년 4.19 혁명을 맞는다. 이후 죽기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와 시론, 시평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한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가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쳤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1888년 시카고 출생. 영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12년 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회사 중역으로 일하다 1930년대 초 우울증을 이유로 저작에 몰두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를 등장시킨 <빅 슬립>, <안녕 내 사랑>, <기나긴 이별>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말년에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1959년 사망했다.
'생생한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 사회학적 시각을 가진 언론인, 은유의 재능을 타고난 작가, 미국 최고의 문학가(뉴욕타임스)'로 평가되는 존 업다이크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중추라 할 수 있다. 1932년 출생, 1954년 첫 단편을 쓰고 2009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1922년 11월 11일 태어나 2007년 4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블랙유머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로 리처드 브라우티건, 무라카미 하루키, 더글러스 애덤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21년 11월 11일 모스끄바에서 태어났다. 공산적사회주의 모임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특별 사면되어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1854년까지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간 내면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독자적인 소설 기법으로 근대 소설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승옥은 6.25 이후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1950년대 작가들의 엄숙주의, 교훈적인 태도, 도덕적 상상력을 뿌리 채 흔들어 버린 감수성의 혁명가로 불린다. 1962년 김현.최하림 등과 함께 '산문시대'를 창간했다. 1967년 동인문학상, 1977년 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1899년 4월 러시아의 상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19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독일로 망명한다. 최초 작품들은 러시아어로 썼지만, 국제적 명성을 얻은 것은 영어로 쓴 작품들이 출판된 후였다. <롤리타>의 기념비적인 성공으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글쓰기에만 전념했으며 1977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인시류 채집 취미로 곤충학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1883년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계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학 시절인 1904년 첫 작품을 집필하며 삶의 의미를 문학 창작에 두었으나 아버지의 강한 영향으로 법학 공부를 했다. 졸업 후 프라하의 국영 보험회사에서 14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밤에는 글쓰기를 병행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미완성이며 생전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35년 일본 에히메 현에서 태어나 1954년 도쿄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단테, 라블레, 발자크, 포, 예이츠 등을 비롯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반영웅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대학 재학 중인 1958년, 23세의 나이에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860년 러시아 타칸로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며, 졸업 후 의사로 근무하며 본격적 문학활동에 나섰다. 풍자와 유머,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남겼으며 1904년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1809~1849. 미국 시인이며 소설가, 비평가. 그는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괴기소설과 시로 유명하며, 미국에 있어서 단편소설의 개척자이자, 고딕소설, 추리소설, 범죄소설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191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80년 파리에서 '결전의 날'이라는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프랑스 소설가. 무공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인 그는 유럽과 아메리카 여러나라의 외교관으로 일했다. 1945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1975년 <자기 앞의 생>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해 또 한 번 수상함으로써 평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882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성직에 입문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예술가의 길을 선택, 대학 시절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시집 <실내악>,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장편소설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 희곡 <망명> 등을 냈다. 성인이 되어서 대부분의 삶을 아일랜드 밖에서 보냈지만, 그의 정신적 세계는 고향인 더블린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초 인간 군상의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과 당시의 각박했던 사회상을 그려냈다.
1936년 에세이 <표리>, 1939년 서정적 에세이 <결혼>을 출간했으며, 1940년 반정부활동 혐의로 알제리에서 추방되었다. 2차 대전 때는 소설 <이방인>(1942)과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1942)를 집필, 인생은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나 의미가 없으므로 더욱 더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부조리의 철학'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1957년 '날카로운 진지성을 지니고 오늘날 인간의 의식에 던져지는 여러 문제에 빛을 비춘 공적'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 1월 4일 파리 근교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29년 10월 21일 인류학자와 작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11살때 이미 최초의 소설을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지에 제출했다 거절당했다. 1969년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십여 차례 추가 수상) 훌륭한 문체, 도교, 무정부주의, 여성주의, 정신적/사회적 테마에 집중하며 최고의 과학소설/판타지 문학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1917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부터 과학과 저술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주로 우주 비행에 대한 소설과 글을 출판했고 영국 행성간 학회의 임원이기도 하다. 1951년 전업 저술가가 되어 20권이 넘는 논픽션과 20권이 넘는 소설을 펴냈으며 이외 많은 글과 단편을 기고했다. 1977년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킨 데 대한 탁월한 공로로 브래드포드 워시번 상을 받았다. 오랜 기간 스리랑카에서 살았으며, 2008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이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무수한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산시로>, <문>, <그 후>, <마음>, <행인> 등의 명작을 발표했으며 1916년 영면했다.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 이후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로 당선되었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1년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여 활동하며 시작에 몰두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있으며, 사후 <기형도 전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883년 크레타 섬 이라클레이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 아래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자유와 자기 해방을 위한 3단계 투쟁을 계획했다. 1단계 투쟁은 압제자 터키로부터의 해방, 2단계 투쟁은 인간 내부의 무지, 악의, 공포와 같은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의 해방, 3단계 투쟁은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였다. 니체를 접한 후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으며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의 소설가로 1775년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나 178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부터 사무엘 존슨, 헨리 필딩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대표작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엠마> 등의 작품을 남기고 <설득>을 탈고한 1816년경부터 건강을 해쳐 이듬해 42세로 세상을 등졌다.
1828년 러시아 중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1851년 카프카스에 주둔한 포병대에 들어갔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발표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팔십여 년이라는 생애 동안 방대한 작품을 썼으며,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탐독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작가의 입지를 공고히 했으며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 편력시대>, <색채론>, <이탈리아 기행> 등을 집필했다.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해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1902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5년 발표한 <토르티야 평원>으로 처음 대중적 반응을 얻었으나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진지하고 위협적인 주제를 선택했다. <승산 없는 싸움>, <생쥐와 인간에 대하여> (퓰리처상 수상)에 이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분노의 포도>를 발표했다. <에덴의 동쪽> 이후 영화, 연극 등의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821년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고통과 질병, 죽음의 분위기를 체득하며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간질로 추정되는 신경발작을 계기로 학업을 그만두고 요양하며 집필에 전념했다. <감정 교육>, <성 앙투안느의 유혹> 등 십자가의 고행에 비유되는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1856년 <마담 보바리>를 완성했다.
1812년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났다. 1833년 잡지에 투고한 단편이 실리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836년 단편집 <보즈의 스케치>를 출간했다. 곧이어 발표한 고아 소년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는 작가의 지위를 확립했다.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두 도시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 등의 작품이 있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 일확천금을 꿈꾸며 온갖 사업에 손을 대다 쫓기는 생활에 이른 그는 통속소설가의 삶을 버리고 <올빼미 당원>을 집필한다. 이 작품의 성공과 함께 세계문학사의 걸작으로 남은 90여편의 작품 모음집 <인간 희극>을 써냈다. <외제니 그랑제>, <골짜기의 백합>, <고리오 영감>, <환멸> 등이 이 <인간 희극>에 들어있다.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이자 동화 작가. 예술지상주의의 대표자로 불린다. 1854년 더블린에서 태어나 운동을 싫어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대학생활 중에는 긴머리와 괴상한 옷차림으로 '유미주의의 사도'라고 자처했다. 1890년 첫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했으며 1900년 11월 쓸슬히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 <살로메>, <레딩 감옥의 노래>, <옥중기>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레코드 상점의 관리자, 라디오 아나운서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 전업작가로 나섰다. 36편의 과학소설과 112개의 단편을 발표한, 가장 많은 작품을 써낸 SF 작가 중 하나로 초현실적 분위기에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1982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 그를 기려 SF문학상인 '필립 K. 딕 기념상'이 제정되었다.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20세기 일본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지방 호족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학생 시절부터 습작과 문학동인지 발행을 주도하며 작가를 지망했다. 좌익 운동에 경도되어 프롤레탈리아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이 속한 계급과 정치적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괴로워하다 1929년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1948년 약물 중독과 폐병으로 인한 극도의 피로 속에서 네 번째 자살을 시도해 성공했다. 사체는 그의 생일은 6월 19일에 발견되었다.
독일 출신의 유태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며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했다.
이성에 대한 확신 위에 구축되어 온 서양 근대사상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고,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재구성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그를 두고 '19세기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라고 평했을만큼 그의 글은 인문학,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비견되는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문학평론가 헤럴드 블룸은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4명의 미국 소설가 중 하나로 그를 뽑은 바 있다. 시카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쓴 첫 번째 장편소설 <과수원지기>로 포크너 상을 받았으며 이후 <바깥의 어둠>, <신의 아들>, <서트리>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핏빛 자오선>을 기점으로 초기의 고딕풍 소설에서 묵시록적 분위기가 배어 있는 서부 장르 소설로 작품세계를 전환했으며 <로드>로 2007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1882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이자 페미니즘, 평화주의,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20세기를 풍미했으며 1960년대 새롭게 부흥한 페미니스트들의 시금석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최고의 지성들과 가까이 지냈으나 1895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증 증세를 보여 평생 두통과 결핵 등에 시달렸다. 제임스 조이스, T.S. 엘리엇, 프로이트 등과 소통하던 그는 전쟁이 계속되던 1941년, 우즈 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로도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 에디트 슈타인과 함께 4대 유태인 여류 철학자로 꼽힌다.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하노버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유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평생 강하게 간직하며 살았는데, 이러한 조건이 그의 삶이나 사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나 뮌헨 대하고가 엑 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시나리오와 단편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34세가 되던 해 한 극단의 제의로 쓴 작품 <콘트라베이스>의 성공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기상천외한 역작 <향수>로 순식간에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으나 이후 일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은둔자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1980년대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 '체호프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불린다. 1988년 8월 2일 워싱턴 주 포트 앤젤레스에서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 등의 작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1932년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의 권위자였던 오토 플라스와 아우렐리아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토 플라스는 실비아가 여덟 살 때 자살하는데, 이 사건은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된다. 1950년 장학생으로 스미스여대에 입학한 그는 이미 400편이 넘는 시를 쓴 상태였다. 영국의 계관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하였으나 아들 니콜라스가 태어난 1962년부터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고, 이 무렵 한달에 서른 편의 시를 써내는 열정을 보였다. 1963년 2월 11일 가스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1950년 도쿄에서 태어난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작가. 1960~64년에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했다. 하루에 7권씩 20년간 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06년 5월 25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미우리 문학상, 고단샤 에세이 상 등을 수상했으며, <프라하의 소녀시대>, <마녀의 한 다시>, <대단한 책> 등의 저작을 남겼다.
1942년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작고하기까지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불문학자로서 <프랑스 비평사>, <시칠리아의 암소> 등 주요한 업적을 남긴 그는 또한 1962년 이후 문학평론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상상력과 인간>, <사회와 윤리>에서 시작하여 <말들의 풍경>, <행복한 책읽기>에 이르는 그의 비평은 우리 문학의 새로운 넓이와 깊이를 창출해내었다고 평가받는다.

소설가이자 자전거 라이더.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가 영문학에 심취, 영문과로 전과했다. 경제사정/가정환경 등의 이유로 학교를 중퇴하고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현장을 주로 취재했다. 박래부와 함께 한 문학기행 꼭지를 통해 글 잘 쓰는 기자로 통하게 되었으며, 시사저널,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등을 거쳐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칼의 노래>를 통해 '한국문학에 떨어진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후 소설가로 왕성한 활동 중이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상문학상(1981),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적이고 소박한 일상에 대한 글쓰기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2011년 1월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도쿄게이자이대학 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고뇌의 원근법>, <디아스포라 기행> 등이 있으며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 등을 '현대문학'에 실으며 등단했다.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토지>는 총 5부, 원고지 4만 장 분량으로 1994년 8월 15일 탈고되었다. 탈고 전부터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자리잡은 <토지>와 함께 박경리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봉으로 우뚝 섰다. 2008년 5월 5일 오후 2시경 숨을 거뒀다.

영국 런던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피버 피치>, <하이 피델리티>, <어바웃 어 보이> 등의 영화화와 함께 전세계적 유명세를 치렀다. 익살과 지성, 풍부한 감성을 겸비한 영국 정상의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팝 뮤직과 책에 관한 다양한 취향을 바탕으로 두 권의 에세이집을 펴낸 음악광이자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축구팀의 열성 팬으로 유명하다.
1964년 미야기 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했다. 1991년 일본판타지노벨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여섯 번째 사요코>로 데뷔한 이후 미스터리, 판타지, SF, 호러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결코 기존의 테두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하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로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대표작으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 <밤의 피크닉>, <흑과 다의 환상> 등이 있다.
1936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8세 되던 해 자신의 역사 선생과 결혼했다. 1956년 반체제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갓난아기를 안고 조국을 탈출했으며,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해 시계공장에서 노동하며 헝가리어로 시를 썼다. 27세에 대학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웠고 7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등의 역작을 남겼다.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6.25로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이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15세 때 가장이 되었다. 1966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다갈라 불망비'로 등단했다. 원래 명쾌한 문장을 기반으로 한 사회 풍자소설에 능했으나,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를 짙게 쓰며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시대적 모순을 주로 그렸다.

런던 태생의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에세이스트.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에 살며 농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해오고 있다.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등의 저작이 있으며 소설 로 1972년 부커상을 수상했다.
1934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우크라이나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에서 인문학 학사, 물리학 석사,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탠퍼드 의과대에서 유전학 조교수, 하버드 대학교 천문학 조교수를 지냈다. NASA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과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저술과 방송을 통해 세계적인 지성으로 주목받았다. <코스모스>는 지금까지 영어로 출판된 과학책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책이며, <에덴의 용들>은 풀리처상을 수상했다. 1996년 12월 20일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하여 영등포에 정착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피난지를 전전했다. 경복고교 재학 중 단편 '팔자령'으로 당선되었고, 1962년 봄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다.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74년 들어 본격적 창작 활동에 돌입하여 '객지', '삼포 가는 길' 등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 단편들을 발표했으며 진보적 민족문화운동의 추진자로서도 활약했다. 1989년 동경.북경을 경유하여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에 체류했다. 1993년 4월 귀국, 방북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 받고 1998년 사면되었다.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자의식 과잉과 지적 우월감이 느껴지던 초기작을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사회적 매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했다. 특히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에 대한 집착은 이른바 언어사회학적 관심으로 심화되었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8년 8월 9일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