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지만 야성적이고 영리하며 프로페셔널한 악당 파커. 남성미 넘치는 모습에 여자들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 반면 남자들 고개를 돌리게 하는 파커는 주로 은행을 털거나 무기밀매 현장을 덮치는 등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신분증 위조나 다른 사람의 돈을 슬쩍하는 일은 일상이며, 홀로 아무 대책 없이 폭력조직에 시비를 거는 일을 서슴지 않는 그는 악당 중의 악당이다. 자신을 배신한 자는 철저히 응징하고, 죽여야 할 자가 있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냉혈한 반영웅이 왜 1962년부터 작가가 작고하는 2008년까지 반세기에 걸쳐 미국 문화를 선도하며 시대를 점유했던 걸까? 바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목적을 향해 무작정 나아가는 행동력 때문일 것이다.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운 좋게 죽음을 모면한 그는 구멍 난 양말과 구겨진 양복을 입은 무일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향하는 곳은 아내가 있는 뉴욕이다. 배신한 옛 동료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미스터리작가협회로부터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수여받은 범죄소설의 거장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선보이는 파커 시리즈는 거칠고 냉혹하며 위험한 그들만의 세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세상엔 감성이나 양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1967년 <포인트 블랭크>, 1999년 <페이백> 등으로 영화화되어 호평을 받은 데 이어 영미문학의 거장 스티븐 킹, 댄 시먼스 등이 오마주를 헌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 세상을 여는 시리즈의 첫 작품 『사냥꾼』을 통해 이젠 전설로 자리한 거장의 진면목을 다시금 느껴보기 바란다.
종종 스티븐 킹은 초자연적인 공포나 미치광이 살인마를 등장시킨 와중에도 공포에 천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 킹이 집중하는 곳은 바로 등장인물의 내면이다. 그가 삐뚤어진 인간이면 분명히 대가를 치를 것(공포의 일부가 되거나 잡아먹힐 것)이고, 미친 듯한 두려움을 선한 의지로 극복한다면 (비록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더라도) 분명 소중한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호러 장치를 보조적으만 이용할 때의 스티븐 킹이 써낸 이야기들은 대부분 무척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냥 스토리만 대충 소개해서는 정말로 시시한 이야기처럼 보일 것이다.
<별도 없는 한밤에>에 실린 세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 역시 스티븐 킹이 공포를 보조적으로 사용한 사례에 속한다. 공포를 유발하는 요소들은 등장인물의 내면묘사에 위기를 일으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그럼 안 무섭냐, 꼭 그렇지는 않다. 좀 무섭거나 오싹하는 데가 있다. 그럼 반전이 있다거나 그에 상응하는 촘촘한 스토리라인에 사로잡히게 되느냐. 아니 그쪽은 아예 번지를 잘못 찾아오신 경우다. 그러니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이렇게 읽는 쪽이 가장 재미있다. 멍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엉성한 일상과 닮은 모습을 가진 이들이 어느 날 특별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발견하게 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다 선택을 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팔짱 끼고 바라보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인물의 내면에 가하는 압력의 세기와 방향을 조절하며 그를 악몽으로 밀어넣고 그 위에 지옥에서 빌려온 듯한 유머와 쓸쓸한 정경 묘사를 끼얹어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소설집은 잘 쓰여진 드라마다. 다만 완전범죄와 악령과 연쇄살인범 등등이 나올 뿐이다. 독자들은 여기 등장하는 어떤 주인공도 감탄하면서 바라볼 수 없다. 우리와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킹은 독자들에게 묻는 듯하다. 그래, 어땠어? 당신이라면 어때? 잘 할 수 있겠어? 아,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말이죠...
THE 좀비스 - 상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5,400원(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