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게 <왜란 종결자>는 이우혁 월드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작품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퇴마록>의 호쾌함과 <치우천왕기>의 웅장함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소박했던(?) 것이다. 물론 십 몇 년 전 이야기다. 지금 다시 읽는 <왜란 종결자>는 한국 판타지의 제왕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한편에서는 <퇴마록>의 모습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치우천왕기>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 둘의 모습을 모두 지울 새로운 역사 판타지로서의 개성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현재 이어지고 있는 '이순신 시대의 붐'을 제왕은 이미 진작에 예견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세상의 악마들은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아자젤의 경우에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단 너무 규모가 큰 소원은 안 되고, 대부분 한시적으로만 작용하는 짧은 소원들만 가능하다. 대신에 아자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을 팔 필요도 없고 소원을 빌 횟수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도 않다. 아자젤은 지옥에서 워낙 보잘것 없는 작은(말 그대로 크기부터가 1인치가 안 된다) 악마이기에 인간 세상에서 자신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걸로 족하다. 적어도 본인 말로는 그렇다고 한다. 굳이 제한이 있다면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해코지하는 소원은 아자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마에게 비는 소원 치고는 너무 선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악마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아자젤의 말마따나 인간은 지옥과 악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해온 건지도 모른다.
<아자젤>은 이 작은 악마가 들어준 작은 소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결과가 늘 좋지는 않다. 소원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도 있고(아니, 아자젤의 탓이 아니라 꼼수를 쓴 의뢰인이 문제다) 소원 자체가 두리뭉실해서 황당한 결과를 빚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진심으로 선의에 가득한 경우는 눈앞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맺기도 하지만, 또 늘 그렇지는 않다. 인생사가 다 그렇듯이 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약간 뒤틀린 유머를 전면에 내걸고 완성한 이 악마 이야기는 C. S. 루이스가 창조한 작은 악마 스크루테이프처럼 신앙과 정의에 대해 고찰하게끔 만들지 '않는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 앞에 선 인간들의 생각지도 못한 소동극 뿐이다. 확실히 웃기고 기발한 반전도 틈틈이 선보인다. 그것뿐이다. 글쎄, 단지 그것뿐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네 인생을 더 잘 보여주는 악마는 스크루테이프가 아니라 아자젤인지도 모르겠다. 예비된 미래 따위 없이 오로지 오늘의 우당탕탕 사건들만이 계속 이어지다 어느날 뚝 하고 끝나는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