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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큰 실패를 겪은 젊은 대학원생이 참을 수 없는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집밖으로 뛰쳐나와 새벽 거리를 달린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식당에서 뜻밖에 검정고양이와 마주친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패를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처음 본 검정고양이에게 말한다. “야옹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교정을 볼 때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더라도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손보미의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이야기다.
소설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라는 물음에 내 대답은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손보미 작가에 대해서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어두운 새벽, 무작정 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새벽에 뜻밖에 고양이와의 마주침을 마련해놓은 사람이라고. 고양이가 다가와 내 다리에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부딪침으로 어떤 전환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라고. 책을 준비하는 동안 손보미 작가와 만나면서 나는 종종 그 식당에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스탠드 위에 앉아 있는 검정고양이를 만나는 기분으로.
- 문학동네 편집자 김내리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수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년 젊은작가상, 2014년 젊은작가상, 2015년 젊은작가상,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읽고 난 후에 정말 훌륭하다, 라고 생각한 경험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과장이 아니고) 대부분의 책을 덮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약간 좌절하곤 하죠. 그래도, ‘가장 최근’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두고 대답을 한다면, ‘가장 최근’에 감탄했던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입니다. 창피하지만 일 년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받기 전까진 이 책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야 읽게 되었는데 정말 넋을 잃고 말았죠. 특히 1부 「비밀 노트」를 다 읽었을 때, 이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좋은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죠. 문체나 분위기, 스타일, 화자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도 훌륭하지만, 뭐랄까, 그저 어떤 소년들의 이야기를 툭툭 던져놓고 있을 뿐인데 거기에 슬픔, 좌절, 유머, 아이러니, 그러니까 이 세계의 모습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실망스럽거나 과대평가되었거나 신통치 않은,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책이 있습니까? 가장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사실 이 질문을 그냥 건너뛰어도 좋겠지만, 정말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읽기 전부터 모두들 입을 모아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했고 이미 여러 번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다소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다행히도 그 믿음이 틀렸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대통령께 단 한 권의 책을 권할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권하시겠습니까?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다른 책 『깨어남』에서 파킨슨병에 걸린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객관적 관찰자’라는 위치에서 내려와서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공감적 상상력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 협력, 참여, 관계 맺기 속에서만 비로소 그들이 어떤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우리에게 파킨슨증 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를 말해주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들이 아니면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이러한 태도가 올리버 색스가 자신의 책에서 보여주는 훌륭한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화성의 인류학자』는 올리버 색스의 책 중에 가장 쉽고 재밌는 축에 속하죠. 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감적 상상력” 속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자신의 환자들을 바라봅니다. 환자라는 뭉뚱그려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존재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환자들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올립니다. 우리들은 보고도 그냥 넘겨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에서 그는 한 인간의 삶의 핵심을 찾아냅니다. 그가 그런 걸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는 『마음의 눈』이라는 제목의 책도 썼죠). 다소 낭만적인 견해겠지만 저는 우리가 타인을 뭉뚱그려지고 추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할 때 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아질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학원출판사에서 나온 메르헨 전집입니다. 아마 50권쯤 되었을 텐데 아마도 기억이 정확하다면 1권이 로알드 달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이었고 2권이 『말괄량이 삐삐』였죠. 이 전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소설처럼 다소 비현실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주 현실적인 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었죠.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이야기”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의 이사와 변화 속에서 이 책들이 다 사라져버렸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모으고 있어요. 현재는 절반쯤 모았습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중에서도 음식을 먹는 장면을 무척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초콜릿 공장의 비밀』에서 가난한 찰리가 초콜릿을 아껴 먹는 장면이나, 『불구두 바람샌들』에서 아빠와 아들이 여행중에 륙색에 넣어둔 소시지와 케이크를 꺼내 먹는 장면, 『싫어싫어 골탕먹기』에서 주인공 소년인 시게루가 귤산과 바나나산에서 귤과 바나나를 잔뜩 먹는 장면, 『개구쟁이 오티스』에서 오티스가 학교 식당에서 양배추볶음 중 고기만 골라 먹는 장면 같은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 장면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 음식의 맛이나 촉감, 냄새 같은 걸 떠올리던 어린 저 자신도 생각이 나고요. 모르는 음식(이를테면 치킨 스프나 자두 파이 같은 것)이 나오면 그 맛을 제멋대로 상상해보곤 했죠. 이런 점은 음식을 좋아하는 저의 성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글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음식의 맛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냥 종이에 새겨진 글자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이 그것을 읽는 동안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진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 말입니다.
당신의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과학과 관련된 책들 아닐까요. 제 뇌구조는 수학이나 과학에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계산도 연필과 종이가 없으면 잘 하지 못하니까요. 당연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수학이나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막연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 8년 전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후로는 과학 강연을 들으러 가거나,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관련된 책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과학에 문외한이고 그 학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최근에는 우주와 관련된 가벼운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별”의 개념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던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가끔 저는 과학자들의 문장 때문에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레너드 서스킨드의 『우주의 풍경』 서문은 마치 한 편의 짧은 소설 같습니다.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은 유머러스한 문장들로 가득하죠. 하지만 과학자들의 문장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이 세계의 본질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문학적 기교와는 다른 부분입니다. 세계의 모습을 가장 간결하고 우아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물론 제가 이해하기에는 전혀 간결하지 않지만)를 엿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멀미 때문에 움직이는 차 안이나 전철, 혹은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는 책을 잘 읽지 못합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집중력도 많이 떨어진 탓에 차라리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내몰리는 편을 선호합니다. 이를테면 핸드폰 배터리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책과 단둘이 카페에 남겨졌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정말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죠. 도서관에 가는 것은 나 자신을 책 속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수많은 책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 어쨌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기분좋은 압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다가 그것과 관련된 책을 재빨리 빼들고 와서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어쨌든 도서관에는 책이 많으니까요. 전혀 관련이 없는 여러 분야의 여러 작가들의 책을 잔뜩 빼 와서 도서관 책상 위에 잔뜩 쌓아놓고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단 한 권의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로 "지나치게 능숙해서 가끔 의심스럽다는 비평가의 불평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평과 함께 문단과 독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온 젊은 작가의 기수 손보미의 첫 장편소설.
손보미의 소설에 우리가 사로잡히는 이유는 산뜻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기미들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그러나 말로는 절대 표현될 수 없는 삶의 기미들. 기미란 무엇인가? 정확히 그러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삶의 균열을 예감하게 하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시작도, 정체도, 진행도 알 수 없는, 삶에 끼어드는 예고장 말이다.
대상을 수상한 손보미의 '폭우'는 "이 기이하고 매혹적인 작품은 말과 침묵 사이의 틈새로 흐린 욕망의 풍경을 언뜻언뜻 드러낸다. 언어가 말을 더듬을 때까지 벼랑으로 몰고 가며 태연하게 연출하는 이 잔잔하고 불안한 한 편의 연극은 그 어떤 단정적인 해석도 거부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 잔상이 길게 남는다.(문학평론가 김화영)"는 평을 받았다.
축복
얽힘의 시대
블랙 달리아 1
디어 라이프 (반양장)
나는 우리의 삶 자체가 ‘축복’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그건 그저 나이브한 생각일 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지만 켄트 하루프는 단단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 말이 진실에 다가설 수도 있다고, 기어코 나를 설득해냈다. 소설이 끝나도 이야기는 계속될지니.
팔 년 넘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20세기 양자역학과 관련된 과학자들의 ‘그때-거기’를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양자역학만큼이나(혹은 양자역학보다 더) 불가해한 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어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주인공보다 제멋대로이고, 그 어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세계보다 비정하며, 그 어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보다 땀과 눈물로 끈적끈적하다. 온갖 욕망이 충돌하는 도시의 이면을 끝까지, 지치지 않고 보여준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말이 그저 수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저, 기억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나를 후회하게 만들거나 씁쓸하게 만들거나 눈물짓게 만들었던 그런 기억이. 그저, 삶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던, 그래서 때로는 증오하거나 결국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었던 삶이. 나는 『디어 라이프』를 통해, 그 기억과 삶이 소설이 되는 가장 근사한 현장을 목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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