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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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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단숨에 읽었다‘는 리뷰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럴 집중력이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어느 구간에서만큼은 ‘단숨에 읽게‘되는 <백년의 고독>과 <고래>를 잇는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그 어떤 작가보다 깊은 곳을 섬세하게 건드리지만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 않고도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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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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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가 제 1세계에 고유의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스웨덴 사람에게 바이킹 복장을 하고 시상식에 나오라거나 하는......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61p

***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 질문으로 촘촘하게 엮어가는 어느 스웨덴 소년, 아니 미아의 미국횡단기는 리뷰어들이 코맥 매카시나 허클베리 핀을 외치게 했다. 이들의 이름은 알지만 읽어본 적 없는 나는 소설이 끝나고서야 춘희를 생각했다. <고래>의 춘희, 끝없는 혼자만의 작업으로 장인이 되어버린 벽돌공 춘희, 백 년의 고독 중에서 반 이상을 떠맡고도 공백으로 자리했던 춘희.

<트러스트>로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에르난 디아스의 데뷔작 <먼 곳에서>는 철학박사인 그가 44세에 발표하자마자 단숨에 미국 문단을 사로잡았으며, 사유와 항해와 미국 로드트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게도 마력을 발휘하며 다가왔다. 게다가 이 섬세한 번역은 다름 아닌 <워터댄서>의 역자 강동혁 선생님의 작품이다.

***

삐삐 혹은 리스베트(스밀라)와 춘희가 연상되는 이 고독한 소년은 평생 성장하는 거구의 남자, 지키지 못한 소녀의 살인 누명으로 타락한 전설이 되어버린 거인, 사자 후드를 쓴 괴물이다. 그가 길 위에서 배우고 익힌 과학과 의술과 가죽공예와 사랑은 나머지 우리가 늘어놓고 흥정하는 나머지 모든 것들을 무색하게 한다.

깊이감 있는 미국소설이라면 그러하듯 전반부는 공부하듯 읽어야 하지만 핑고와 헬렌과 에이서를 통해 반복되는 그의 시련은 고통스러운 페이지터너였다. 그의 상실이 희석될 세월까지 따라잡으려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아주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실제 분량보다는 충분히 영겁으로 느껴지는 세월을 지나 마침에 중년과 노년 사이의 어느 쯤에 와 있는 그를 본다.

***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뉴욕이었다. 아메리카에서 둘 다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뉴욕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30p

​침대에서, 아픔을 느끼며, 혼자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리누스를 잃은 이후로 경험해온 대단히 깊은 슬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그는 슬픔과 편안함을 구분할 수 없었다.
-50p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이 된 무언가를 창조했다. -91p

로리머는 이민자 행렬이란 쭉 늘어나 가늘게 기어가는 선이 된 거대한 도시라고 했었다. 그 말이 맞았다. -152p

헬렌은 실제로 그 이름을 발음하려고 노력한, 아메리카의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77p

마침내 슬픔이 그를 따라잡았다. 그는 절대 다른 사람들을 마주볼 수 없을 것이다. 한번 더, 혼자서, 텅 빈 공간에 서 있는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216p

그러나 죽음이라는 선물이 주어지자 호칸은 중독된 근육을 마지막 하나까지 사용해 그 선물을 밀어냈다. -222p

하지만 세상이 돌아왔다. 에이서가 의미와 목적으로 찰랑거리는 세상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267p

그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냥 더이상 디딜 발걸음이 없었다. -284p

"걸었다." 호칸은 질문의 마지막 부분에만 대답했다. -304p

***

책을 '단숨에 읽었다'는 리뷰나 추천사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럴 집중력이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어느 구간에서만큼은 '단숨에 읽게'되는 <백년의 고독>과 <고래>를 잇는 작품이 바로 에르난 디아스의 <먼 곳에서>다. 그러나 이 계보에도 치명적 오류가 있다. 디아스는 그를 은유하는 그 어떤 작가보다 깊은 곳을 섬세하게 건드리지만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 않고도 재미를 선사한다. 필력도 최고였지만 그의 생애에 새겨진 경험과 사유가 더욱 탐나는 작가다.

(문학동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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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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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을 관통한 극적인 요소는 그만큼 회오리처럼 20세기를 살아온 한반도의 민생 그 자체였다. 그러니 그 자신은 단지 그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동시에 이토록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평범조차 힘들게 쟁취한 사람이다. 평범을 어찌 정의하냐는 문제가 있겠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긴급연락처가 있는 삶이 평범이라면 그는 평범을 쟁취하는 데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바쳤다. 그리고 스스로도 뿌듯한 업적인, <전태일 평전>을 출판한 돌베개의 사장이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마지막 과업이 가장 어려웠을 것 같다.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 지인의 권유로 출판한 첫번째 자서전에는 진심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한번 더 회고록을 낸다면 이번에야말로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내면의 고통과 죄책감이나 욕망까지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책으로 먹고 살 정도를 넘어서 섭외 1순위 영업부장이었던 저자도 본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려운 일은 해냈기에 그의 오늘이 조금은 더 뿌듯했으면 좋겠다.

절망과 굴욕의 80년대, 그중에서도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전반전의 이야기까지 평범한 사람의 관점으로 빠르게 돌아볼 수 있다. 만약 심장이 약해서 <1987>을 아직 못보고 있는 독자라면 그 해의 상황도 간략하게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현대사를 다룬 전문서적은 사거나 선물받아도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못했다. <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와 <전태일 평전>이야말로 역사덕후가 아닌 평범한 책덕후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 아닐까. 가방끈이 짧아서 서러웠지만 남부럽지 않게 유명한 책들을 팔아보고 만들어 본 옆집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독자들이 그렇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일반 아이들이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니듯 나에게는 아동보호소, 소년원을 거쳐 서대문교도소에 들어 오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43p

​이는 씨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성시키는 일이었다. 감옥에 한번 들어오고 나면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본격적으로 도둑질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54p

​나 역시 저 국화꽃처럼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음지에서 자랐지만,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가슴이 벅차오르며 한없이 뿌듯해졌다. -84p

​내려놓을 것이 별로 없어서일까, 나는 남들보다 쉽게 뇌를 맑게 비우고 최상의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97p

나 같은 놈이 평범한 인간으로 변신하면 이 사회의 물이 조금은 맑아지는 줄로만 알고 죽기 살기로 발버둥 쳤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노예나 머슴처럼 다루고 부려먹는 또 다른 이들이, 실은 부모의 사랑도 받고 교육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44p

​지금 이곳 사람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면 숨을 쉬고 살아갈 수가 없기에 가슴에 있는 한을 누른 채 살고 있는 겁니다. -185p

전태일 열사의 원고는 나이 어린 미싱사와 시다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동부나 서울시청 같은 곳을 찾아다니다 한계에 부딪히자 스스로를 불사른, 가장 순수한 이웃 사랑 이야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194p

​간첩은 잡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고기를 잡다가 실수로 북방한계선을 넘어가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나온 어부들도 사회가 어수선하면 다시 잡혀 들어가 온갖 고문을 거쳐 고정간첩으로 재탄생되곤 했다. -201p

​나는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둑질이나 하며 구질구지란 절도 죄명으로 들어오다가 국가보안법으로 들어왔으니 스스로 흐뭇했던 것이다. -227p

*

​인간다움을 쟁취하고 본연의 순수함을 발견한 그의 여정은 오직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더욱 소중하다. 오히려 활자가 풍족한 시대에 우리 자신의 언어를 확보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돌아본다.

*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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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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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주장에 단 하나의 반대를 하자면, 이보다 더 말끔할 수 있는 문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련한 소설, 하품나오는 이론서는 물론이고 논픽션의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는 윈덤캠벨문학상의 수상작들도 이렇게 보편에 가까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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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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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결코 깔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고 생애 전반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친다.
-192p, 문을 열며

-

거듭되는 고립과 상실을 겪으면서 거의 떠밀리듯 읽고 쓰는 삶으로 다시 한번 고립되어 상실을 되새기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쓸 것인지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는 동안 머나먼 과거로부터 늘 함께해온 듯한 가치와 방향들은 마치 나침반처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렇게 도달한 중앙역이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와는 스무 살부터 ​삼 년 동안 거의 모든 주요 이벤트를 함께 했고, 내가 살기 위해 일시정지를 했던 동안에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 꼭 붙어있었다.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미묘하고 날카로운 언어들마저 경험으로, 육감으로, 이성으로 마찰없이 교환할 수 있는 사람. 동지애에 우정까지 보태도 반의 반도 설명할 수 없는 친구였지만 각자의 삶의 궤적에서 너무도 느슨하게 스치기만 했고 (그럼에도 드문드문 많은 양의 정보를 업데이트했고) 다시 7년만에 재회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읽고 써 온 이야기는 아주 다르지만 나는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들켰고, 그간 존경해 온 리베카 솔닛이 아닌 바로 신성아가 내 친구라는 사실에 형언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경험적 아픔에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넘어 차갑게 파고든 심연까지 이렇게 쓸 수 있던 '열정과 지성'에 감복한 것은 물론이고 오늘 갑자기 좋아하게 된 작가라 해도 충분히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말끔함'.

저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생략할 수 없는 주제와 맥락의 책이지만 그녀의 주장에 단 하나의 반대를 하자면, 이보다 더 말끔할 수 있는 문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련한 소설가나 하품나오는 이론서는 물론이고 논픽션의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는 윈덤캠벨문학상의 수상작가들도 이렇게 보편에 가까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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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순정한 사랑의 표현이 또 있을까. 당신이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고, 나도 당신을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요구는 값비싼 선물도, 달콤한 언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50p, 타고난다는 오해

​노동이라고 하자면 이 일은 착취의 강도가 너무 심하고, 노동자의 소외는 정점에 이른다. 이보다 악질적인 노동조건도 없을 것이다. -76p, 돈 버는 여성

아무도 나를 두고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버느라 많이 바빠'라든가 '엄마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자'라고 아이에게 변호해주지 않았다. -86p, 돈 버는 여성

그들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내 모른다. 이 키치적 돌봄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는 키치의 특성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100p, 가족 내 정치

보편복지를 포기한 국가의 무신경한 정책 집행은 이렇게 여성을 편 가른다. 돌봄이 얼마나 힘든지 구구절절 증명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누가 더 고생인지 입증하려고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는 돌봄지옥을 체감했다. -106, 가족 내 정치

고통을 받는 이가 몇 살인지, 경제활동을 하는지, 우리 사회에 이바지할 특별한 능력은 있는지 등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을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돌보는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외로워진다.
-131p, 눈에 보이는 구원

그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많은 상처가 이 아이들의 마음에 남게 될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별들이 일제히 빛을 잃는 광경을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이다.
-159p, 의학의 태도

근대적 이분법이 완벽히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철학이 설 자리가 없고, 정치가 작동할 기회가 없다. 돌봄, 의료공백, 고가 신약 급여 등재, 건강보험 재정위기, 존엄사, 연명의료, 호스피스 등 수많은 난제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187p, 의학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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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왜'가 과찬이 아님을 알게 된 이상, 그보다 더 구구절절한 예찬은 불필요한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이 앳 시리즈라는 영예를 이어받은 것도, 출판사에서 '저자' 덕분이라고 말해준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우리의 사랑과 의리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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